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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부 글 부문 당선 - 장수연(의예·18)

작품 소개

이 작품은 저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고등학교 때 여러 사정으로 자퇴를 한 저는 오랜 기간 방황했고 힘들어했어요. 하지만 그때의 아픈 경험이, 지금 제가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자퇴 시절의 저를 ‘바다’라는 주인공에게 투영시켰고, 그런 저를 도와주었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동호’라는 사람에게 집약시켰어요. 아직 어린 상태를 1장, 동호와 함께 꿈을 찾는 과정을 2장,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3장에 담았어요. 법적으로 ‘어른’이 되어야 하는 나이인 스물 그리고 20대 초반에 방황하는 친구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어른이 된 자신이 완벽히 성숙할 것이며, 상처도 방황도 없이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리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자신이 스물이 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죠. 그런 친구들에게 자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고, 지금의 방황을 통해 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어요. 훗날 힘들어하는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좋은 어른 말이죠.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어린 어른’ 들이 고뇌에 빠져 아파하지 않았으면 해요.

1. 바다, 아이

나는 아직도 바다에 뛰어드는 꿈을 꾼다. 
홀로 우뚝 서 있는 높은 절벽에, 상쾌한 바닷바람이 가볍게 몰아친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푸른 바다는 나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며 유동적으로 일렁인다. 하늘과 바다 모두 너무나 푸르러서 그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태양만이 나를 내리쬐고 있다. 바닷바람이 내 볼에 마구 부대낀다.
푸른 바다가 나를 폭신하게 받아줄 듯 팔을 쩍 벌리며 절벽에 부딪혀 하얀 물보라를 보글보글 일으킨다. 쏴아 하는 바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절벽 끝에 서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절벽에 부딪혀 깨지는 파도 소리가 내 귀를 막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얘야, 내게 안기렴, 나에게 오렴. 
이윽고 바다에 내 모든 것을 맡긴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나는 떨어진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별도 안 되는 푸른, 아찔한 광경이 뒤섞여 한순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곧 온 세상이 깜깜해진다.
이상한 느낌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와 닿아야 하는데, 바다의 비릿한 물이 콧속으로 입속으로 흘러넘치도록 들어와야 하는 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푸른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주에 나 홀로 있는 것처럼, 혼자 남은 것처럼.
나는 그렇게 어둠 속에 홀로 웅크리며, 쓸쓸하고 고독한 검은 우주에서 지쳐 쓰러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안 될 거야. 너는 다 포기해야만 해. 너는 능력 없어…….
혼자 남았다는 공포와 서글픔보다도 그 비웃음 소리가 내 몸을 지독하게 옥죄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 푸른 세상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힘없이 머리 한 켠을 스쳐 지나갔다.

“바다야!”
나의 이름을 멀리서 누군가가 부른다. 눈살을 찌푸리며 실눈을 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 안에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한 햇살이 갈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 옆엔 빨간 테두리의 촌스러운 시계, 책장 그리고 책상.
‘아, 집이구나.’
나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비빌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창문만 바라보며 몽롱한 기운을 잠재웠다. 웽하는 이명과 함께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곧이어 밀려오는 두통, 그리고 잠깐동안 밀려오는 정적. 
“딸! 김바다! 일어나야지?”
찢어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반쯤 눈을 감은 내 고막을 기어코 흔들었다. 거실에서 누군가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거로 봐선 엄마가 내 방에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생하게 귓가를 스치던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집 앞 6차선 도로에선 시원한 바닷소리는커녕 차들이 뒤엉켜 내는 시끄러운 경적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는 찰나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엄마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날씬한 검은 정장용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분주한 손놀림으로 팩트를 얼굴에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일어나야지. 오늘 오전에 상담 있잖아.”
“안 그래도 지금 일어났어.”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네모진 이불 끝을 칼처럼 딱딱 맞춰 개는 동안 엄마는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내가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다야, 그런데.”
날 뜯어보며 관찰하던 엄마가 한 발짝 다가왔다. 베개를 이불 위에 올려놓던 나는 행동을 멈추고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혹시 울었니?”
“응?”
그제야 나는 눈가를 만져보았다. 눈가와 볼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휘몰아치는 부끄러움과 함께, 인상을 쓰며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자 엄마가 혀를 차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니?”
“몰라.”
나는 눈가를 훔치며 말을 잘랐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아침부터 기분이 우중충했다. 우거지상으로 엄마를 따라 거실로 나가자 거실 탁자 위에 조촐하게 놓인 몇 가지 반찬들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따뜻한 밥이 보였다. 바쁜 아침일 텐데도 불구하고 청소를 해두었는지 오늘따라 유달리 거실이 하얗고 깨끗해 보였다. 엄마는 엄마 방에서 검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며 부산을 떨며 나왔다.
“어머, 벌써 8시 반이네. 지각하겠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엄마가 경악하며,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가 검은 하이힐에 발을 욱여넣었다. 하이힐을 급하게 신다 발을 헛디뎌 몸을 휘청하던 엄마는 잠깐 행동을 멈추며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일 시작한 뒤로 매일 아침이 전쟁터네. 미안. 아침은 저기 올려둔 거 먹으면 돼.”
뒤돌아서던 엄마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맞다, 약 챙겨 먹어. 알겠지? 안 먹으면 안 돼. 그리고 오늘 상담 까먹지 말고 잘 가고.”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현관에 놓인 쇼핑백들과 핸드백을 한 번에 번쩍 들더니 후다닥 대문으로 달려갔다. 나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랑한다, 바다야.”
내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자 엄마는 눈웃음을 한번 지어 보이더니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엄마가 나가버린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집 안에는 나 혼자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주위가 고요했다. 매일 아침 이 순간이면 늘 그렇듯, 똑딱거리는 거실의 괘종시계 소리만이 이 세상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며 바삐 운동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엄마가 떠난 매일 아침에는, 삶의 모든 의욕을 잃게 하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시계 소리만이 거실을 가득 메운다. 매일 이 시간이면 집의 새하얀 벽지조차 날 집어삼킬 듯 서늘하게 다가온다. 
나는 쓸쓸히 괘종시계 앞을 지나가 테이블 앞에 앉아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주변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아 튼 티비에서는,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를 농담을 주고받으며 게스트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티비를 보며 밥을 입에 퍼 넣었다.
“아니, 그런데 말이죠……. 하하하.”
남자 게스트 한 명이 자기가 겪었던 일을 꺼내자 주변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말에 웃는 걸까. 안 그래도 매일 맞이하기 두렵고 힘든 아침에, 눈물에,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듣고 나니 오늘 하루를 완전히 망친 기분이었다. 밥을 다 먹어갈 때 즈음에 옆에 놔둔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오늘은 상담하는 날입니다. 예약시간 : 11시 30분’
상담센터에서 보낸 인터넷 문자였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남은 밥 한 숟갈을 억지로 입에 떠 넣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바다야 안녕? 잠깐 앉아서 기다려줄래?”
상담 선생님인 구미경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예쁜 미소를 띠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소파에 앉았다. 상담센터에는 차분한 클래식 음악이 부드럽게 흐르고, 뒤편에서는 커피머신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진한 커피 향을 맡고 있자니 바닥까지 가라앉아 우울하던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몇 달 전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받는 이 상담의 이름은 ‘자퇴학생 필수상담’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학생은 주기적으로 상담센터에 방문해 상담을 받아야 한다. 특히 나같이 안 좋은 이유로 자퇴한 경우엔 더더욱.
얼마 하다가 그만둘 것 같았던 이 상담은 올해 봄부터 시작해 벌써 4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가 좋아서, 딱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나에겐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분주한 선생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따라 바쁘신 모양이었다. 잠깐 노래나 들을까 해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찰나에,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내 옆에 앉았다.
옆을 흘깃 보니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얇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하고, 키는 조금 커 보였다. 옆에 책가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쟤도 자퇴생인가.’
시선을 거두고 이어폰을 다시 끼우려는 찰나, 그 애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개의 어색한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안녕.”
남자애가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안녕.”
반년 넘게 사람과의 소통이라곤 상담선생님과 엄마밖에 없었던지라, 남과의 대화가 익숙지 않았다. 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었다.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끝났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나는 상담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잘 지냈어?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니?”
선생님이 내 앞에 음료와 다과를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홀짝이고 대답했다.
“다 똑같아요. 무기력하고, 집에선 가만히 있고. 우울증약은 잘 챙겨 먹어요. 최근엔 취미로 산책을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힘없고 맥락 없이 내뱉는 내 말을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 
“와, 대단한데. 좋은 발전이야. 지난달까지만 해도 계속 누워있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유일하게 감사한 일이 있다면, 선생님을 만난 일이 아닐까. 선생님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근데 제 모습을 보면 너무 자괴감 들어요.”
“왜?”
“저는 5개월만 지나면 스물이고 어른이 되잖아요. 제 친구들은 이제 대학에 가거나 취직을 하는데 저만 집구석에서 이러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다. 남들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 혼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꼴이라니. 너무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다야, 바다에겐 극복해야 할 상처가 있잖아. 지금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네가 아주 멋져. 조금 늦어져도 괜찮아. 인생은 길고, 몇 년 정도 늦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나를 다독이셨지만 나는 바닥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제가 멋진 어른이 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성적도 좋고 항상 승승장구했으니까요. 화장을 예쁘게 하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하는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제 인생이 이렇게 망할 줄 몰랐어요.”
상담의 패턴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의 신세 한탄, 선생님의 조언. 훌쩍훌쩍, 토닥토닥.
1시간이 넘는 상담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옆 상담실에서 나오는 그 남자애와 다시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 한 쌍과 방금 울어서 약간 붉어진 눈동자 한 쌍이 또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안녕.”
“응, 안녕.”
나는 황급히 눈물 자국을 가리며 작게 대답했다. 서둘러 센터를 빠져나가려는 나를, 그 애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너 이름이 뭐야? 난 강동호.”


2. 바다, 비상

나는 오늘 또 꿈을 꾼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온화하고 따뜻한 날씨. 콧구멍에 다가오는 바다의 비린 짠 내음. 귓가에 스치는 바닷바람 소리, 저 멀리 어디에선가 허공에 부르짖는, 땅을 울리는 웅장한 뱃고동 소리. 꿈속의 나는 마치 오감이 다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로 바다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속 그 모든 것을 느낀다.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렌다. 몸이 너무나도 가벼워서 날갯짓하면 당장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비상하려는 순간, 나를 멸시하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나는 또다시 무너진다. 쓰러진다. 바다의 푸른빛은커녕 진득한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푹 꺼진다.

꿈에서 깨어나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숨을 헉헉대며 눈물과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자퇴한 이후 매일같이 꾸는 꿈이다.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두운 새벽에, 목이 막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2년 전, 바다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나는, 항해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진학한 해양고등학교에서 죽도록 노력하고 공부했다. 여학생이지만 남학생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체력단련을 하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했고 친구 관계도 좋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도 있었다. 졸업 후에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회사도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나를 시기했던 친구의 이간질로 나는 소외되어 혼자가 되었다. 최고의 회사를 가려고 매일 고군분투했던 나의 책상에, 넌 할 수 없다는 악담을 담은 쪽지가 올라와 있었다. 길을 걸으면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는 나를 찼으며,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결정적인 건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의 불합격 소식이었다. 고졸전형 인사 담당자는 분명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소외감으로 인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꽤 괜찮게 면접을 치른 나의 손에 날아온 건 불합격 통지서였고, 그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져 복도에서의 시선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부둣가 앞에 걸터앉아 엉엉 울었다. 해가 지는 노을을 보면서, 별이 뜰 때까지 울었다. 몇 시간을 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쯤 아무 말 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몇 달 사이에 얼굴이 바뀌어 등장한 내 모습에 엄마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 자퇴할래.’ 한 마디에 집안은 벌컥 뒤집혔다.
“올해만 버티면 졸업이잖아. 그냥 참고 다녀! 그 정신머리로 사회에 나가서 뭘 하려고!”
방 밖에서 소리 지르는 아빠, 그리고 그런 아빠를 말리는 엄마. 방 안에서 귀를 틀어막고 앉아있는 나. 
내가 봐도 나는 형편없었다. 올해만 버티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오는데, 그걸 못 버티겠다는 이유로 앞의 2년을 모조리 버리다니. 그러면 중졸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 자퇴를 하지는 않으니까, 아빠로선 답답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텼다간 부서질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 나. 세 사람의 패턴은 몇 달간 쳇바퀴 돌듯 지속되었고, 얼마 전 부모님이 별거하면서부터 겨우 멈추었다.
“저는 제가 한심해요. 저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할 것 같아요.”
아빠가 집을 나간 날, 구미경 선생님 앞에서 한참을 울었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카톡.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또 혼자 우울의 늪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에 카톡이 왔다.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카톡이라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냉큼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 목록을 확인했다.
-안녕. 나 어제 상담센터에서 만난 사람인데, 동호. 뭐해?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대화창을 보기만 하고 멍하니 있으니 또 카톡이 울렸다.
-생각해보니 지금 새벽 5시구나. 자고 있겠네. 미안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채팅창을 클릭했다. 그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모티콘이 하나 더 와 있었다.
-안 자. 방금 깼어.
긴 고민 끝에 두 마디를 쳐서 보낼 수 있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이렇게 나를 잘 알다니. 방에 CCTV가 달린 건 아닌지 소름이 돋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한동안 말이 없다가, 동호가 이렇게 카톡을 보냈다.
-그렇구나. 너 괜찮으면 지금 새벽 산책 같이할래?
이 시간에 산책이라니. 게다가 제안한 상대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 너무 뜬금없었고, 옛날의 나라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거절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특이한 남자애에게 호기심이 생겨 승낙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러면 30분 뒤에 지하철역 근처 산책로에서 만나.
엄마의 책상 위에 산책하러 간다는 쪽지를 휘갈겨 써두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강이 졸졸 흐르는 산책로 근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리는 일단 같이 걸었다. 여름 새벽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워서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너도 자퇴생이야?”
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먼저 걸었다. 동호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산책로 입구 편의점에 잠깐 멈추더니, 캔 음료 두 개를 사와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우리는 캔 음료 하나씩 들고 홀짝이며,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왜 처음 본 나에게 대뜸 이름을 물어봤느냐고 묻자 동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처음 봤는데 외로워 보여서. 나랑 같은 처지인가 보다 했지. 딱 보니까 책가방도 없는 게, 왠지 자퇴생 같더라고.”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웃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 대해 질문했다. 몇 살인지,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동호는 나와 동갑인 열아홉이고 얼마 전 자퇴한 이후 딱히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보낸다고 말했다. 동질감이 느껴져서일까, 이상하게도 동호와의 대화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편안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약간씩 왼 다리를 저는 것 같았고, 오랫동안 걷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잔디밭에 앉아 말없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간질였고, 강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산뜻하게 들려왔고, 점점 날이 밝아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사실 우리처럼 고3에게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는 잘 없잖아. 넌 뭐 때문에 자퇴한 거야?”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을 쓰다듬으며 동호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의 침묵을 그는 기다려주었고,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더듬더듬 맥락 없이 설명했다. 나의 성적, 시기하던 친구, 실패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자퇴.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진지하게, 또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침 햇살이 완전히 밝아 우리를 비출 무렵이 되어서야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힘들었겠다며 위로를 해주던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음, 태권도 선수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곧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고쳤다.
“아니. 태권도 선수였었어. 체고를 다녔었던.”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나에게, 동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다 네가 그 꿈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것처럼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사고로 몸을 심하게 다쳤거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너도 눈치챘겠지만 그래서 다리도 약간 저는 거야.”
“그 사고란 게…….”
“오토바이 사고였어. 한 번의 실수로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꿈을 포기해야만 했어. 수술은 잘 끝났지만 더는 선수 생활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나는 힘들었겠다, 라는 다소 진부한 위로밖에 해줄 수 없었다.
“학교에선 재활 치료를 열심히 받아보자고 했지만, 그냥 내가 포기했어. 사고 이후에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그래서 그냥 도망치듯 자퇴했어. 어차피 더는 운동도 할 수 없을 테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아직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동호가 주머니에서 메달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열심히 닦아 놓은 듯한 금빛 금메달이었다. 그가 살짝 웃어 보였다.
“나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는 기분을 알아. 나 이래 봬도 전국에서 알아주는 선수였거든.”
동호의 웃는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시큰해졌다. 운동을 포기한 이후에도 예전 메달을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닐 정도면 얼마나 사랑했고 좋아했던 일이었을까. 동호의 모습이 마치 매일 꿈속에서 바다를 그리는 내 모습 같아서 가슴 아팠다. 한때 새벽까지 항해 교과서를 뒤적이며 혼자 예습을 하던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메달을 만지작거리던 동호는 메달을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으며 다시 걷자고 했다. 나는 동호를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이루어진 이 만남이, 나와 동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은 아직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우리의 만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때론 깜깜한 새벽이기도 했고, 사람이 북적북적한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한적하고 여유로운 저녁일 때도 있었다. 서로가 필요할 때마다 우린 항상 서로를 만났다. 사실 거의 매일이었다. 때론 집 근처 강가를 산책하고, 때론 집 근처 맛집에서 파스타를 먹거나, 액션 영화를 보거나 예쁜 카페에 갔다. 동호는 구경미 선생님만큼이나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하는 일은 매번 만날 때마다 달랐지만, 우리의 주 대화 내용은 주로 우리의 인생에 관한 것이었다.
“난 내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어. 솔직히 죽고 싶기도 해. 이렇게나 나약한데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1인분은 할 수 있을까?”
가끔 우울의 늪에 빠질 때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몰아붙이고 자책하는,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동호는 늘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우린 아직 어려. 두 달 뒤면 스물이지만, 스물에 완벽히 성숙한 어른이 되라는 법은 없잖아? 조급해하지 말자. 다른 이들에 비해 우린 참 많은 일을 겪었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을 통해, 남들보단 느리지만, 결국엔 더 좋은 어른이 될지도 몰라.”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어서도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다. 대화는 절반은 눈물과 신세 한탄이었지만, 긍정적인 동호 덕분에 결론만큼은 항상 좋았다. 늘 부정적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동호 덕분에 바뀌고 있었다. 동호를 만나기 전 항상 싱글벙글한 나에게 엄마는 무슨 좋은 일 있느냐며 매일 물어보았고, 가끔 그 애에게 갖다 주라며 간식을 싸주기도 했다.

어느 날, 길에서 오랜만에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수시로 이미 대학에 붙었다며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어느 대학에 지원하느냐고 묻는데,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나는 동호 앞에서 또 엉엉 울었다.
“동호야, 내 친구들은 곧 성인이 되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데, 나는 절대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인생의 작은 고비도 못 넘긴 내가 어떻게 어른이 돼? 이렇게 한심한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더 큰 고비를 넘기지? 언젠간 결국 또 쓰러지지 않을까?”
북받친 마음에 눈물이 손등 위로 툭툭 떨어졌다. 가을 공기에 손이 시렸지만, 딱히 주머니에 넣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손이든 뭐든 다 내어놓고 맡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정말 두려워. 지금 이 작은 고비도 나에겐 괴로운데, 사람들이 나보고 정신력이 약하대. 그런 정신력으로는 험난한 세상을 못 살아갈 거래.”
설움이 더 북받쳐 올라 나는 결국 엉엉 울었다. 동호가 알아들었을지도 모를 만큼 서럽게 울면서, 지난 추석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나보고 맨날…….”
지난 추석,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나의 자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친척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참견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팠던 말은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더더욱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겨우 학교에서 있었던 일 하나 가지고 몇 년이나 쌓아온 걸 와르르 무너뜨렸는데……. 이런 정신력으로 인생을 더 살아갈 수 있을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무너지기 전에 다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한밤중에 몇 번이나 커터칼을 꺼냈다가 넣었다. 몇 번이나 목을 맬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나에겐 자살할 정신력조차 없었다. 그 점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동호는 손수건을 건넸다. 한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으니 그가 내 등을 토닥였다.
“바다야, 네가 그렇게 아파봤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이렇게 다쳐봤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배려심 깊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난 우리의 이 고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더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가 되었든, 우리는 아파봤기에 더 잘해낼 거야.”
동호가 손을 내밀었다.
“바다야,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우린 지금 멈춰있지만, 나중엔 남들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되자. 너에게 상처를 줬던 그런 어른들 말고, 나중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빛이 되어주는 그런 어른.”

우리는 약속하며 서로 손을 잡았다. 가을바람에 오래 놓였던 두 손은 차가웠지만, 분명 온기가 존재했다. 곧 동호의 큼지막한 손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 위에 얹어졌다. 한쪽 어깨에 무게가 실리자 마음속 어딘 가에서 뜨거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쩐지 예전과는 좀 다른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감사함’이란 감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왜인지 모르게 기대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아는 걸까, 그는 조금씩 손에 힘을 줘 내 몸을 자기에게로 당겼다. 
내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을 때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쓰고 어두웠던, 뼈 시리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드디어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펑펑 울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동호와 포장마차에서 닭꼬치를 사 먹다가 문뜩 시야에 도서관이 들어왔다. 내가 멈춰 서자 동호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멈췄다.
“왜 그래?”
“우리 한번 들어가 볼래?”
예전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때를 제외하곤 가본 적 없는 곳이다. 그것도 1년이 다 되어가던가. 오랜만에 들어가는 도서관의 책 냄새가 굉장히 낯설었다. 사각사각 필기하는 사람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 여유롭게 책을 즐기는 사람 등 굉장히 다양한 사람이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재밌어 보이는 책을 한 권 뽑아 소파에 앉으니, 동호는 한참이나 책꽂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스포츠에 관련된 책을 들고 앉아 내 옆에 앉았다. 한참 책을 읽다가 무심코 옆을 봤을 때 동호는 책에 코를 박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곧 시선을 거두고 독서에 집중했다.
그 날 이후 갑자기 우리의 만남의 장소는 책 냄새 풀풀 풍기는 도서관이 되었다. 나는 소설이나 자기계발서를 읽고, 동호는 스포츠 도서를 읽었다. 이따금 나는 집에 있던 선박 교과서를 들고 와 읽기도 하고, 동호는 노트북을 들고 와 대학이니 수능이니 하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곧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서로가 할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캔커피를 놔두거나 응원 쪽지를 써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버팀목이었다. 어느 순간 우리의 대화 속에서 눈물과 신세 한탄이 그쳤다. 둘 다 이 변화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잘 웃기 시작했고 동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꿈이 생긴 게 확실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러나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락하던 우리가 비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침에 만나 도서관에 가서 늦은 밤에 헤어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밤길이 위험하다며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호와 매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들었다. 랩이 나오면 나는 형편없는 랩 실력으로 따라불렀고, 동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킥킥댔다. 댄스곡이 나오면 너 나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어깨춤을 췄다. 내 인생에서, 그리고 동호의 인생에서도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3. 바다, 어른

“엄마, 나랑 잠깐 여행갈까?”
도서관에 다녀온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퇴근한 뒤 방바닥에 앉아 지친 발을 주무르고 있던 엄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퇴한 뒤로 내가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고, 뭔가를 제안한 적도 없었다. 평생 주부였던 엄마가 별거 이후 나 때문에 일을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그 일을 힘들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엄마보단 나의 상황이 더 중요해서 방 안에 틀어박히기만 했다.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인 눈물을 닦았다.
“물론이지, 바다야. 어디 가고 싶어?”

며칠 뒤 나는 엄마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꽃분홍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참 예뻐 보였다. 우리는 감천문화마을에서 어린 왕자와 사진을 찍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지를 먹고, 남포동에서 낙곱새를 먹으며 연신 맛있다를 외쳤다. 엄마와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본 게 참 오랜만이었다. 주름이 질 정도로 계속 웃기만 하는 엄마를 보니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감정이 반복해서 들어, 드문드문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녁 무렵 우리는 아무도 없는 태종대에 도착했다. 관광객이 빠져나가고 텅 빈 태종대는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했다. 낮까지 왁자지껄하던 엄마와 나는 어느 순간 아무 말 없어졌다. 우리는 서로 팔짱을 끼고 계속해서 걸었고, 어느 순간 아무도 없는 해변에 도착했다. 주변에 불빛이라곤 바다 낚시꾼들의 불빛뿐. 깜깜한 해변에서 우리는 누워 별을 보았다. 
옆을 슬쩍 보니 엄마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일까? 나는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그렇게 손을 잡고 가만히 있던 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행을 오자고 했던 것이었다.
“엄마. 나 이제 다시 일어나서 공부할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항해사 하고 싶어. 지금부터 검정고시 보고 수능 준비해서 내년에 해양대학교 갈 거야.”
엄마 내 쪽을 향해 몸을 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줘서 이야기했다.
“나 이제 걱정 안 해줘도 돼. 나 다 컸어. 이제는 포기하지 않을게. 아니, 포기해도 다시 일어날게.”
우르르, 쏴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긴장되는 숨을 골랐다. 과연 엄마가 이해해줄까? 바다에서 그렇게 상처받고 다쳤던 나인데. 내가 다시 거기에 가는 걸 허락해줄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바다야. 그리고 사랑한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와 나는 엄마를 얼싸안고 울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신발을 벗고 발 사이로 들어오는 물 섞인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이제 겨울이 막 다되어가는 날씨의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가 바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바닷물에 반사된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조개껍데기를 몇 개 주워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동호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내 모습을 지켜본 엄마가 깔깔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민박집으로 돌아가자며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엄마를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마와 내가 맨발로 걸어온 자국들이 해변의 모래에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 발자국들이 위태롭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흔들리긴 했어도 나름 열심히 잘 해왔다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정말 잘할 거라고. 바다야, 넌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야. 잘할 거야, 좋은 어른이 될 거야……. 다정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슴 속 우물에서 따뜻한 감정이 한가득 실려 올라왔다.
먼바다를 내다보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 속에서도 열심히 항해하는 선박들의 등화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에 한 걸음 다가서는 내게 부드러운 파도가 손짓하며 우르르 달려왔다. 가을의 막바지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날 저녁, 동호에게 전화했다. 내 꿈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같이 꿈을 향해 제대로 달려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동호의 모습이 보였다. 단 이틀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너무 반가웠다.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간신히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집 앞 벤치에 앉아 동호가 사온 따뜻한 캔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오늘따라 아무 말도 없었고, 시선을 땅으로 던지며 묵묵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동호야, 여기 선물.”
나는 그에게 조개껍데기가 전시된 액자를 건네주었다. 태종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로 만든 것이었다. 한동안 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동호에게 주는 감사의 선물이었다.
“나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공부할 거야. 다시 항해사가 되어보려고.”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호의 미소는 참 따뜻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액자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내가 요즘 참 많이 바뀌었다? 긍정적이고 잘 웃고……. 그게 다 너 덕분인 것 같아. 동호 네가 없었으면 다시 꿈꾸는 것도 불가능했어.”
“잘 생각했어, 바다야. 넌 바다랑 진짜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췄다. 동호가 갑자기 가을 저녁의 추위 때문에 새빨개진 내 볼을 따뜻하게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얼굴에 닿았다.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지며 무더워졌다.
“정말이야,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그는 내 볼을 잡은 채로 잠깐 뜸을 들였다. 그의 손에서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동호는 분위기를 잡으며 메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 종이를 내게 건넸다. 종이에는 ‘ㅇㅇ대학교- 스포츠 과학과’에 대한 소개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찬찬히 그 종이를 뜯어보았다. 
“스포츠 과학?”
“다리를 다쳤으니까 선수 생활은 못 하겠지만,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졌어. 바다 너랑 같이 도서관에 다니면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더라고. 찾아봤더니 대학에서 이런 걸 배울 수 있다고 하더라.” 
동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우리 이모가 계신 서울에 가서 검정고시랑 수능 준비를 같이 병행할까 싶어.” 
동호가 서울에 간다니.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당연히 지금처럼 계속 같이 공부하고 준비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쉬웠지만, 나는 그 마음을 숨기며 동호를 축하해주었다.
“너도 다시 꿈을 찾았구나. 정말 축하해.”
”너랑 이야기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 다시 시작해야겠단 걸. 고마워. 너도 잘해야 해.”
동호도 내 등을 토닥였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말없이 캔 커피를 홀짝였다. 가을바람이 휭 하고 불며 낙엽이 데굴데굴 굴렀다. 곧 동호가 여기에 없다니, 갑자기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넌 곧 여기 없겠구나.”
“응. 가족들이랑 이야기했어. 꿈이 다시 생겼다고 하니까 정말 좋아하시더라고. 열심히 해볼 거야.”
아쉬움과 서운함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못 보겠네.”
“응. 그래도 바다 너한테는 연락 자주 할게.”
내가 끝내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하자, 동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었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동호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근데 바다야.”
“응?”
“나도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동호가 다시 가방을 뒤적이더니, 갈색 종이봉투를 꺼내서 나에게 쥐여주었다.
“지금 말고, 내가 가면 꺼내봐. 알았지?”
지금은 꺼내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며, 동호는 절뚝이며 멀어졌다. 몇 번인가 뒤돌아보며 내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손을 흔들며 배웅하다가, 궁금한 마음에 얼른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 종이봉투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부스럭거리는 종이 사이로 금빛의 물건이 삐져나왔다. 메달. 그것은 메달이었다. 동호가 첫 만남에 보여준, 그리고 그 뒤로도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그 메달이었다. 정성스레 닦아놓은 메달을 보자 온통 정신이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동호야.”
나는 메달을 손에 쥐고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가장 소중한, 어쩌면 동호에게 있어선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그 물건. 만약에 나였다면 바다와 맞먹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그 물건을 나에게 선물한 의미를 알았을 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대문을 열고 뛰쳐나가 한 번 더 소리 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절뚝이며 걷던 그가 내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뜨거워지는 가슴 속의 감정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난 그만 온 힘을 다해 달려가서 그의 등을 와락 안아버렸다.
둘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심장 소리만 요동치듯 둥둥 울려댈 뿐. 나는 흐느끼며 그를 꼭 감싸 안았다. 
새로 시작한다는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울로 가겠노라고 덤덤히 이야기하긴 했지만, 동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다시 도전하기로 한 뒤부터 항상 내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난 잘할 수 있을까?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마음속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동호는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내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둘 다 잘할 거야. 괜찮아.”
동호 역시 눈물이 섞여 떨리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담담했다. 마치 우리가 잘할 거란 게 확실하단 것처럼. 안도감이 몰려오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때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나만 남아 가녀리게 빛나고 있던 마지막 가로등 불빛이 딱 하고 꺼지는 순간, 그가 휙 뒤돌아 나를 감싸 안았던 것이다. 바다와 같이 넓은 가슴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 애의 품이, 새까만 어둠과 함께 내게 와 닿았다.
고장난 가로등 아래에서 우리는 더 깊이 끌어안았다. 감사를 가득 담아서, 눈물 섞인 사랑을 담아서, 더 깊숙이 서로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겨울이 다 되어버린 추운 날씨였지만, 누군가와 다정한 체온을 나누고 있는 이곳에는 따뜻한 희망만이 가득했다. 우리는 확신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소년 소녀가 오롯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 다 잘해낼 것이란 것을.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마음속에서 꺼내 다시 쏘아 올릴 준비를 하는 두 어린 어른의 곁에, 노란 달빛이 따뜻하게 걸려있었다.

1. 바다, 아이

나는 아직도 바다에 뛰어드는 꿈을 꾼다. 
홀로 우뚝 서 있는 높은 절벽에, 상쾌한 바닷바람이 가볍게 몰아친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푸른 바다는 나에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며 유동적으로 일렁인다. 하늘과 바다 모두 너무나 푸르러서 그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의 태양만이 나를 내리쬐고 있다. 바닷바람이 내 볼에 마구 부대낀다.
푸른 바다가 나를 폭신하게 받아줄 듯 팔을 쩍 벌리며 절벽에 부딪혀 하얀 물보라를 보글보글 일으킨다. 쏴아 하는 바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절벽 끝에 서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절벽에 부딪혀 깨지는 파도 소리가 내 귀를 막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얘야, 내게 안기렴, 나에게 오렴. 
이윽고 바다에 내 모든 것을 맡긴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나는 떨어진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별도 안 되는 푸른, 아찔한 광경이 뒤섞여 한순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곧 온 세상이 깜깜해진다.
이상한 느낌에 팔을 허우적거렸다. 차가운 물이 피부에 와 닿아야 하는데, 바다의 비릿한 물이 콧속으로 입속으로 흘러넘치도록 들어와야 하는 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푸른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주에 나 홀로 있는 것처럼, 혼자 남은 것처럼.
나는 그렇게 어둠 속에 홀로 웅크리며, 쓸쓸하고 고독한 검은 우주에서 지쳐 쓰러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안 될 거야. 너는 다 포기해야만 해. 너는 능력 없어…….
혼자 남았다는 공포와 서글픔보다도 그 비웃음 소리가 내 몸을 지독하게 옥죄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 푸른 세상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힘없이 머리 한 켠을 스쳐 지나갔다.

“바다야!”
나의 이름을 멀리서 누군가가 부른다. 눈살을 찌푸리며 실눈을 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 안에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흐릿한 햇살이 갈색 테두리로 둘러싸인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 옆엔 빨간 테두리의 촌스러운 시계, 책장 그리고 책상.
‘아, 집이구나.’
나는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비빌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창문만 바라보며 몽롱한 기운을 잠재웠다. 웽하는 이명과 함께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곧이어 밀려오는 두통, 그리고 잠깐동안 밀려오는 정적. 
“딸! 김바다! 일어나야지?”
찢어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반쯤 눈을 감은 내 고막을 기어코 흔들었다. 거실에서 누군가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거로 봐선 엄마가 내 방에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풀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생하게 귓가를 스치던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집 앞 6차선 도로에선 시원한 바닷소리는커녕 차들이 뒤엉켜 내는 시끄러운 경적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몸을 완전히 일으키려는 찰나에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엄마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날씬한 검은 정장용 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분주한 손놀림으로 팩트를 얼굴에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일어나야지. 오늘 오전에 상담 있잖아.”
“안 그래도 지금 일어났어.”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네모진 이불 끝을 칼처럼 딱딱 맞춰 개는 동안 엄마는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내가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다야, 그런데.”
날 뜯어보며 관찰하던 엄마가 한 발짝 다가왔다. 베개를 이불 위에 올려놓던 나는 행동을 멈추고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혹시 울었니?”
“응?”
그제야 나는 눈가를 만져보았다. 눈가와 볼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휘몰아치는 부끄러움과 함께, 인상을 쓰며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자 엄마가 혀를 차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니?”
“몰라.”
나는 눈가를 훔치며 말을 잘랐다.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아침부터 기분이 우중충했다. 우거지상으로 엄마를 따라 거실로 나가자 거실 탁자 위에 조촐하게 놓인 몇 가지 반찬들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따뜻한 밥이 보였다. 바쁜 아침일 텐데도 불구하고 청소를 해두었는지 오늘따라 유달리 거실이 하얗고 깨끗해 보였다. 엄마는 엄마 방에서 검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며 부산을 떨며 나왔다.
“어머, 벌써 8시 반이네. 지각하겠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엄마가 경악하며,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가 검은 하이힐에 발을 욱여넣었다. 하이힐을 급하게 신다 발을 헛디뎌 몸을 휘청하던 엄마는 잠깐 행동을 멈추며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일 시작한 뒤로 매일 아침이 전쟁터네. 미안. 아침은 저기 올려둔 거 먹으면 돼.”
뒤돌아서던 엄마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맞다, 약 챙겨 먹어. 알겠지? 안 먹으면 안 돼. 그리고 오늘 상담 까먹지 말고 잘 가고.”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현관에 놓인 쇼핑백들과 핸드백을 한 번에 번쩍 들더니 후다닥 대문으로 달려갔다. 나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사랑한다, 바다야.”
내가 무표정으로 고개를 까딱하자 엄마는 눈웃음을 한번 지어 보이더니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엄마가 나가버린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집 안에는 나 혼자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주위가 고요했다. 매일 아침 이 순간이면 늘 그렇듯, 똑딱거리는 거실의 괘종시계 소리만이 이 세상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며 바삐 운동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엄마가 떠난 매일 아침에는, 삶의 모든 의욕을 잃게 하는,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시계 소리만이 거실을 가득 메운다. 매일 이 시간이면 집의 새하얀 벽지조차 날 집어삼킬 듯 서늘하게 다가온다. 
나는 쓸쓸히 괘종시계 앞을 지나가 테이블 앞에 앉아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주변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아 튼 티비에서는, 왜 하고 있는지도 모를 농담을 주고받으며 게스트들끼리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티비를 보며 밥을 입에 퍼 넣었다.
“아니, 그런데 말이죠……. 하하하.”
남자 게스트 한 명이 자기가 겪었던 일을 꺼내자 주변 사람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말에 웃는 걸까. 안 그래도 매일 맞이하기 두렵고 힘든 아침에, 눈물에, 나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듣고 나니 오늘 하루를 완전히 망친 기분이었다. 밥을 다 먹어갈 때 즈음에 옆에 놔둔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오늘은 상담하는 날입니다. 예약시간 : 11시 30분’
상담센터에서 보낸 인터넷 문자였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남은 밥 한 숟갈을 억지로 입에 떠 넣고,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바다야 안녕? 잠깐 앉아서 기다려줄래?”
상담 선생님인 구미경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예쁜 미소를 띠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소파에 앉았다. 상담센터에는 차분한 클래식 음악이 부드럽게 흐르고, 뒤편에서는 커피머신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진한 커피 향을 맡고 있자니 바닥까지 가라앉아 우울하던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몇 달 전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받는 이 상담의 이름은 ‘자퇴학생 필수상담’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하는 학생은 주기적으로 상담센터에 방문해 상담을 받아야 한다. 특히 나같이 안 좋은 이유로 자퇴한 경우엔 더더욱.
얼마 하다가 그만둘 것 같았던 이 상담은 올해 봄부터 시작해 벌써 4달째 이어지고 있다. 이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가 좋아서, 딱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나에겐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분주한 선생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따라 바쁘신 모양이었다. 잠깐 노래나 들을까 해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찰나에,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내 옆에 앉았다.
옆을 흘깃 보니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였다. 얇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하고, 키는 조금 커 보였다. 옆에 책가방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쟤도 자퇴생인가.’
시선을 거두고 이어폰을 다시 끼우려는 찰나, 그 애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개의 어색한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안녕.”
남자애가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안녕.”
반년 넘게 사람과의 소통이라곤 상담선생님과 엄마밖에 없었던지라, 남과의 대화가 익숙지 않았다. 나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었다. 둘 사이의 어색한 기류는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끝났다. 이름이 불리자마자 나는 상담실로 후다닥 들어갔다.
“잘 지냈어? 이번 주엔 어떤 일이 있었니?”
선생님이 내 앞에 음료와 다과를 내려놓으며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홀짝이고 대답했다.
“다 똑같아요. 무기력하고, 집에선 가만히 있고. 우울증약은 잘 챙겨 먹어요. 최근엔 취미로 산책을 시작했어요.”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힘없고 맥락 없이 내뱉는 내 말을 묵묵히 다 들어주었다. 
“와, 대단한데. 좋은 발전이야. 지난달까지만 해도 계속 누워있고 싶다고 그랬었잖아.”
학교를 자퇴한 이후로 유일하게 감사한 일이 있다면, 선생님을 만난 일이 아닐까. 선생님의 미소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근데 제 모습을 보면 너무 자괴감 들어요.”
“왜?”
“저는 5개월만 지나면 스물이고 어른이 되잖아요. 제 친구들은 이제 대학에 가거나 취직을 하는데 저만 집구석에서 이러고 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혐오감을 감출 수가 없다. 남들은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 혼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꼴이라니. 너무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바다야, 바다에겐 극복해야 할 상처가 있잖아. 지금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네가 아주 멋져. 조금 늦어져도 괜찮아. 인생은 길고, 몇 년 정도 늦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나를 다독이셨지만 나는 바닥만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제가 멋진 어른이 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성적도 좋고 항상 승승장구했으니까요. 화장을 예쁘게 하고 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하는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제 인생이 이렇게 망할 줄 몰랐어요.”
상담의 패턴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의 신세 한탄, 선생님의 조언. 훌쩍훌쩍, 토닥토닥.
1시간이 넘는 상담이 끝나고 나가는 길에, 옆 상담실에서 나오는 그 남자애와 다시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 한 쌍과 방금 울어서 약간 붉어진 눈동자 한 쌍이 또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안녕.”
“응, 안녕.”
나는 황급히 눈물 자국을 가리며 작게 대답했다. 서둘러 센터를 빠져나가려는 나를, 그 애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너 이름이 뭐야? 난 강동호.”


2. 바다, 비상

나는 오늘 또 꿈을 꾼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온화하고 따뜻한 날씨. 콧구멍에 다가오는 바다의 비린 짠 내음. 귓가에 스치는 바닷바람 소리, 저 멀리 어디에선가 허공에 부르짖는, 땅을 울리는 웅장한 뱃고동 소리. 꿈속의 나는 마치 오감이 다 살아있는 것처럼, 실제로 바다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속 그 모든 것을 느낀다.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렌다. 몸이 너무나도 가벼워서 날갯짓하면 당장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비상하려는 순간, 나를 멸시하는 온갖 모욕적인 말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나는 또다시 무너진다. 쓰러진다. 바다의 푸른빛은커녕 진득한 먹물 같은 어둠 속으로 푹 꺼진다.

꿈에서 깨어나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숨을 헉헉대며 눈물과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자퇴한 이후 매일같이 꾸는 꿈이다.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두운 새벽에, 목이 막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2년 전, 바다를 사랑하고 동경했던 나는, 항해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진학한 해양고등학교에서 죽도록 노력하고 공부했다. 여학생이지만 남학생에게 뒤처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체력단련을 하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했고 친구 관계도 좋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도 있었다. 졸업 후에 나를 스카우트하려는 회사도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나를 시기했던 친구의 이간질로 나는 소외되어 혼자가 되었다. 최고의 회사를 가려고 매일 고군분투했던 나의 책상에, 넌 할 수 없다는 악담을 담은 쪽지가 올라와 있었다. 길을 걸으면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는 나를 찼으며,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결정적인 건 가장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의 불합격 소식이었다. 고졸전형 인사 담당자는 분명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소외감으로 인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꽤 괜찮게 면접을 치른 나의 손에 날아온 건 불합격 통지서였고, 그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져 복도에서의 시선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 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부둣가 앞에 걸터앉아 엉엉 울었다. 해가 지는 노을을 보면서, 별이 뜰 때까지 울었다. 몇 시간을 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쯤 아무 말 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몇 달 사이에 얼굴이 바뀌어 등장한 내 모습에 엄마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 자퇴할래.’ 한 마디에 집안은 벌컥 뒤집혔다.
“올해만 버티면 졸업이잖아. 그냥 참고 다녀! 그 정신머리로 사회에 나가서 뭘 하려고!”
방 밖에서 소리 지르는 아빠, 그리고 그런 아빠를 말리는 엄마. 방 안에서 귀를 틀어막고 앉아있는 나. 
내가 봐도 나는 형편없었다. 올해만 버티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오는데, 그걸 못 버티겠다는 이유로 앞의 2년을 모조리 버리다니. 그러면 중졸이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고등학교 3학년에 자퇴를 하지는 않으니까, 아빠로선 답답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더 버텼다간 부서질 것 같았다.
아빠와 엄마, 나. 세 사람의 패턴은 몇 달간 쳇바퀴 돌듯 지속되었고, 얼마 전 부모님이 별거하면서부터 겨우 멈추었다.
“저는 제가 한심해요. 저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할 것 같아요.”
아빠가 집을 나간 날, 구미경 선생님 앞에서 한참을 울었었다. 선생님은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카톡.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또 혼자 우울의 늪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에 카톡이 왔다. 너무 오랜만에 받아보는 카톡이라 처음엔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냉큼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 목록을 확인했다.
-안녕. 나 어제 상담센터에서 만난 사람인데, 동호. 뭐해?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지 몰라 대화창을 보기만 하고 멍하니 있으니 또 카톡이 울렸다.
-생각해보니 지금 새벽 5시구나. 자고 있겠네. 미안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채팅창을 클릭했다. 그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이모티콘이 하나 더 와 있었다.
-안 자. 방금 깼어.
긴 고민 끝에 두 마디를 쳐서 보낼 수 있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오랜만에 하는 연락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이렇게 나를 잘 알다니. 방에 CCTV가 달린 건 아닌지 소름이 돋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한동안 말이 없다가, 동호가 이렇게 카톡을 보냈다.
-그렇구나. 너 괜찮으면 지금 새벽 산책 같이할래?
이 시간에 산책이라니. 게다가 제안한 상대가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라. 너무 뜬금없었고, 옛날의 나라면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 거절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특이한 남자애에게 호기심이 생겨 승낙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러면 30분 뒤에 지하철역 근처 산책로에서 만나.
엄마의 책상 위에 산책하러 간다는 쪽지를 휘갈겨 써두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강이 졸졸 흐르는 산책로 근처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리는 일단 같이 걸었다. 여름 새벽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워서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너도 자퇴생이야?”
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먼저 걸었다. 동호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산책로 입구 편의점에 잠깐 멈추더니, 캔 음료 두 개를 사와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우리는 캔 음료 하나씩 들고 홀짝이며,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왜 처음 본 나에게 대뜸 이름을 물어봤느냐고 묻자 동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처음 봤는데 외로워 보여서. 나랑 같은 처지인가 보다 했지. 딱 보니까 책가방도 없는 게, 왠지 자퇴생 같더라고.”
우리는 처음으로 같이 웃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에 대해 질문했다. 몇 살인지, 요즘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동호는 나와 동갑인 열아홉이고 얼마 전 자퇴한 이후 딱히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보낸다고 말했다. 동질감이 느껴져서일까, 이상하게도 동호와의 대화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편안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약간씩 왼 다리를 저는 것 같았고, 오랫동안 걷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잔디밭에 앉아 말없이 운동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간질였고, 강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산뜻하게 들려왔고, 점점 날이 밝아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사실 우리처럼 고3에게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는 잘 없잖아. 넌 뭐 때문에 자퇴한 거야?”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잎을 쓰다듬으며 동호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의 침묵을 그는 기다려주었고,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더듬더듬 맥락 없이 설명했다. 나의 성적, 시기하던 친구, 실패와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자퇴. 일련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진지하게, 또 가만히 들어주었다.
아침 햇살이 완전히 밝아 우리를 비출 무렵이 되어서야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힘들었겠다며 위로를 해주던 그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음, 태권도 선수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곧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고쳤다.
“아니. 태권도 선수였었어. 체고를 다녔었던.”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나에게, 동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다 네가 그 꿈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것처럼 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사고로 몸을 심하게 다쳤거든.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너도 눈치챘겠지만 그래서 다리도 약간 저는 거야.”
“그 사고란 게…….”
“오토바이 사고였어. 한 번의 실수로 어릴 때부터 키워왔던 꿈을 포기해야만 했어. 수술은 잘 끝났지만 더는 선수 생활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나는 힘들었겠다, 라는 다소 진부한 위로밖에 해줄 수 없었다.
“학교에선 재활 치료를 열심히 받아보자고 했지만, 그냥 내가 포기했어. 사고 이후에 하루하루가 너무 고통스러웠거든. 그래서 그냥 도망치듯 자퇴했어. 어차피 더는 운동도 할 수 없을 테고,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아직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동호가 주머니에서 메달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열심히 닦아 놓은 듯한 금빛 금메달이었다. 그가 살짝 웃어 보였다.
“나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는 기분을 알아. 나 이래 봬도 전국에서 알아주는 선수였거든.”
동호의 웃는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시큰해졌다. 운동을 포기한 이후에도 예전 메달을 항상 주머니에 넣어 다닐 정도면 얼마나 사랑했고 좋아했던 일이었을까. 동호의 모습이 마치 매일 꿈속에서 바다를 그리는 내 모습 같아서 가슴 아팠다. 한때 새벽까지 항해 교과서를 뒤적이며 혼자 예습을 하던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메달을 만지작거리던 동호는 메달을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으며 다시 걷자고 했다. 나는 동호를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이루어진 이 만남이, 나와 동호의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은 아직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우리의 만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때론 깜깜한 새벽이기도 했고, 사람이 북적북적한 점심시간이기도 했고, 한적하고 여유로운 저녁일 때도 있었다. 서로가 필요할 때마다 우린 항상 서로를 만났다. 사실 거의 매일이었다. 때론 집 근처 강가를 산책하고, 때론 집 근처 맛집에서 파스타를 먹거나, 액션 영화를 보거나 예쁜 카페에 갔다. 동호는 구경미 선생님만큼이나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하는 일은 매번 만날 때마다 달랐지만, 우리의 주 대화 내용은 주로 우리의 인생에 관한 것이었다.
“난 내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어. 솔직히 죽고 싶기도 해. 이렇게나 나약한데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1인분은 할 수 있을까?”
가끔 우울의 늪에 빠질 때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몰아붙이고 자책하는,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동호는 늘 좋은 조언을 해주었다.
“우린 아직 어려. 두 달 뒤면 스물이지만, 스물에 완벽히 성숙한 어른이 되라는 법은 없잖아? 조급해하지 말자. 다른 이들에 비해 우린 참 많은 일을 겪었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을 통해, 남들보단 느리지만, 결국엔 더 좋은 어른이 될지도 몰라.”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어서도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다. 대화는 절반은 눈물과 신세 한탄이었지만, 긍정적인 동호 덕분에 결론만큼은 항상 좋았다. 늘 부정적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동호 덕분에 바뀌고 있었다. 동호를 만나기 전 항상 싱글벙글한 나에게 엄마는 무슨 좋은 일 있느냐며 매일 물어보았고, 가끔 그 애에게 갖다 주라며 간식을 싸주기도 했다.

어느 날, 길에서 오랜만에 중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수시로 이미 대학에 붙었다며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어느 대학에 지원하느냐고 묻는데,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 나는 동호 앞에서 또 엉엉 울었다.
“동호야, 내 친구들은 곧 성인이 되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데, 나는 절대 어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인생의 작은 고비도 못 넘긴 내가 어떻게 어른이 돼? 이렇게 한심한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더 큰 고비를 넘기지? 언젠간 결국 또 쓰러지지 않을까?”
북받친 마음에 눈물이 손등 위로 툭툭 떨어졌다. 가을 공기에 손이 시렸지만, 딱히 주머니에 넣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에 손이든 뭐든 다 내어놓고 맡겨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난 정말 두려워. 지금 이 작은 고비도 나에겐 괴로운데, 사람들이 나보고 정신력이 약하대. 그런 정신력으로는 험난한 세상을 못 살아갈 거래.”
설움이 더 북받쳐 올라 나는 결국 엉엉 울었다. 동호가 알아들었을지도 모를 만큼 서럽게 울면서, 지난 추석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나보고 맨날…….”
지난 추석, 학교를 잘 다니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나의 자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친척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참견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팠던 말은 ‘정신력이 약해서 그렇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억울하고 분해서 울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더더욱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겨우 학교에서 있었던 일 하나 가지고 몇 년이나 쌓아온 걸 와르르 무너뜨렸는데……. 이런 정신력으로 인생을 더 살아갈 수 있을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무너지기 전에 다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한밤중에 몇 번이나 커터칼을 꺼냈다가 넣었다. 몇 번이나 목을 맬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나에겐 자살할 정신력조차 없었다. 그 점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동호는 손수건을 건넸다. 한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으니 그가 내 등을 토닥였다.
“바다야, 네가 그렇게 아파봤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이렇게 다쳐봤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는 배려심 깊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 난 우리의 이 고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더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뭐가 되었든, 우리는 아파봤기에 더 잘해낼 거야.”
동호가 손을 내밀었다.
“바다야, 우리 약속 하나만 하자. 우린 지금 멈춰있지만, 나중엔 남들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되자. 너에게 상처를 줬던 그런 어른들 말고, 나중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빛이 되어주는 그런 어른.”
우리는 약속하며 서로 손을 잡았다. 가을바람에 오래 놓였던 두 손은 차가웠지만, 분명 온기가 존재했다. 곧 동호의 큼지막한 손이 조심스럽게 내 어깨 위에 얹어졌다. 한쪽 어깨에 무게가 실리자 마음속 어딘 가에서 뜨거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쩐지 예전과는 좀 다른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감사함’이란 감정이란 것을 깨달았다. 왜인지 모르게 기대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아는 걸까, 그는 조금씩 손에 힘을 줘 내 몸을 자기에게로 당겼다. 
내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을 때 깨달았다. 인생에서 가장 쓰고 어두웠던, 뼈 시리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드디어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펑펑 울고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동호와 포장마차에서 닭꼬치를 사 먹다가 문뜩 시야에 도서관이 들어왔다. 내가 멈춰 서자 동호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멈췄다.
“왜 그래?”
“우리 한번 들어가 볼래?”
예전에 공부를 열심히 하던 때를 제외하곤 가본 적 없는 곳이다. 그것도 1년이 다 되어가던가. 오랜만에 들어가는 도서관의 책 냄새가 굉장히 낯설었다. 사각사각 필기하는 사람들,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들, 여유롭게 책을 즐기는 사람 등 굉장히 다양한 사람이 많았다. 
아무 생각 없이 가장 재밌어 보이는 책을 한 권 뽑아 소파에 앉으니, 동호는 한참이나 책꽂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스포츠에 관련된 책을 들고 앉아 내 옆에 앉았다. 한참 책을 읽다가 무심코 옆을 봤을 때 동호는 책에 코를 박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가지에 집중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나도 곧 시선을 거두고 독서에 집중했다.
그 날 이후 갑자기 우리의 만남의 장소는 책 냄새 풀풀 풍기는 도서관이 되었다. 나는 소설이나 자기계발서를 읽고, 동호는 스포츠 도서를 읽었다. 이따금 나는 집에 있던 선박 교과서를 들고 와 읽기도 하고, 동호는 노트북을 들고 와 대학이니 수능이니 하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도 했다. 
곧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서로가 할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캔커피를 놔두거나 응원 쪽지를 써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버팀목이었다. 어느 순간 우리의 대화 속에서 눈물과 신세 한탄이 그쳤다. 둘 다 이 변화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좀 더 잘 웃기 시작했고 동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꿈이 생긴 게 확실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고, 그러나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락하던 우리가 비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침에 만나 도서관에 가서 늦은 밤에 헤어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밤길이 위험하다며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호와 매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들었다. 랩이 나오면 나는 형편없는 랩 실력으로 따라불렀고, 동호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킥킥댔다. 댄스곡이 나오면 너 나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어깨춤을 췄다. 내 인생에서, 그리고 동호의 인생에서도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3. 바다, 어른

“엄마, 나랑 잠깐 여행갈까?”
도서관에 다녀온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퇴근한 뒤 방바닥에 앉아 지친 발을 주무르고 있던 엄마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자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퇴한 뒤로 내가 엄마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없었고, 뭔가를 제안한 적도 없었다. 평생 주부였던 엄마가 별거 이후 나 때문에 일을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그 일을 힘들어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엄마보단 나의 상황이 더 중요해서 방 안에 틀어박히기만 했다.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인 눈물을 닦았다.
“물론이지, 바다야. 어디 가고 싶어?”

며칠 뒤 나는 엄마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꽃분홍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참 예뻐 보였다. 우리는 감천문화마을에서 어린 왕자와 사진을 찍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지를 먹고, 남포동에서 낙곱새를 먹으며 연신 맛있다를 외쳤다. 엄마와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해본 게 참 오랜만이었다. 주름이 질 정도로 계속 웃기만 하는 엄마를 보니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감정이 반복해서 들어, 드문드문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녁 무렵 우리는 아무도 없는 태종대에 도착했다. 관광객이 빠져나가고 텅 빈 태종대는 차가운 바람만이 가득했다. 낮까지 왁자지껄하던 엄마와 나는 어느 순간 아무 말 없어졌다. 우리는 서로 팔짱을 끼고 계속해서 걸었고, 어느 순간 아무도 없는 해변에 도착했다. 주변에 불빛이라곤 바다 낚시꾼들의 불빛뿐. 깜깜한 해변에서 우리는 누워 별을 보았다. 
옆을 슬쩍 보니 엄마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일까? 나는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표정을 보지 않아도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 그렇게 손을 잡고 가만히 있던 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행을 오자고 했던 것이었다.
“엄마. 나 이제 다시 일어나서 공부할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항해사 하고 싶어. 지금부터 검정고시 보고 수능 준비해서 내년에 해양대학교 갈 거야.”
엄마 내 쪽을 향해 몸을 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더 힘을 줘서 이야기했다.
“나 이제 걱정 안 해줘도 돼. 나 다 컸어. 이제는 포기하지 않을게. 아니, 포기해도 다시 일어날게.”
우르르, 쏴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긴장되는 숨을 골랐다. 과연 엄마가 이해해줄까? 바다에서 그렇게 상처받고 다쳤던 나인데. 내가 다시 거기에 가는 걸 허락해줄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바다야. 그리고 사랑한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와 나는 엄마를 얼싸안고 울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걷고 또 걸었다. 신발을 벗고 발 사이로 들어오는 물 섞인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을 느끼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이제 겨울이 막 다되어가는 날씨의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가 바로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바닷물에 반사된 달빛에 비쳐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조개껍데기를 몇 개 주워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동호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내 모습을 지켜본 엄마가 깔깔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민박집으로 돌아가자며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엄마를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마와 내가 맨발로 걸어온 자국들이 해변의 모래에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 발자국들이 위태롭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견해 보이기도 했다.
흔들리긴 했어도 나름 열심히 잘 해왔다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정말 잘할 거라고. 바다야, 넌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야. 잘할 거야, 좋은 어른이 될 거야……. 다정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가슴 속 우물에서 따뜻한 감정이 한가득 실려 올라왔다.
먼바다를 내다보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바다 속에서도 열심히 항해하는 선박들의 등화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에 한 걸음 다가서는 내게 부드러운 파도가 손짓하며 우르르 달려왔다. 가을의 막바지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온 날 저녁, 동호에게 전화했다. 내 꿈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같이 꿈을 향해 제대로 달려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전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동호의 모습이 보였다. 단 이틀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너무 반가웠다.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간신히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집 앞 벤치에 앉아 동호가 사온 따뜻한 캔커피를 홀짝였다. 그는 오늘따라 아무 말도 없었고, 시선을 땅으로 던지며 묵묵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동호야, 여기 선물.”
나는 그에게 조개껍데기가 전시된 액자를 건네주었다. 태종대에서 주운 조개껍데기로 만든 것이었다. 한동안 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동호에게 주는 감사의 선물이었다.
“나 이제 본격적으로 다시 공부할 거야. 다시 항해사가 되어보려고.”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호의 미소는 참 따뜻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액자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내가 요즘 참 많이 바뀌었다? 긍정적이고 잘 웃고……. 그게 다 너 덕분인 것 같아. 동호 네가 없었으면 다시 꿈꾸는 것도 불가능했어.”
“잘 생각했어, 바다야. 넌 바다랑 진짜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췄다. 동호가 갑자기 가을 저녁의 추위 때문에 새빨개진 내 볼을 따뜻하게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얼굴에 닿았다.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지며 무더워졌다.
“정말이야, 넌 정말 멋진 사람이야.”
그는 내 볼을 잡은 채로 잠깐 뜸을 들였다. 그의 손에서 두근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나도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동호는 분위기를 잡으며 메고 있던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 종이를 내게 건넸다. 종이에는 ‘ㅇㅇ대학교- 스포츠 과학과’에 대한 소개 글이 적혀있었다. 나는 찬찬히 그 종이를 뜯어보았다. 
“스포츠 과학?”
“다리를 다쳤으니까 선수 생활은 못 하겠지만,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졌어. 바다 너랑 같이 도서관에 다니면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다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생기더라고. 찾아봤더니 대학에서 이런 걸 배울 수 있다고 하더라.” 
동호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 우리 이모가 계신 서울에 가서 검정고시랑 수능 준비를 같이 병행할까 싶어.” 
동호가 서울에 간다니.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당연히 지금처럼 계속 같이 공부하고 준비하게 될 줄 알았는데……. 아쉬웠지만, 나는 그 마음을 숨기며 동호를 축하해주었다.
“너도 다시 꿈을 찾았구나. 정말 축하해.”
”너랑 이야기하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 다시 시작해야겠단 걸. 고마워. 너도 잘해야 해.”
동호도 내 등을 토닥였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말없이 캔 커피를 홀짝였다. 가을바람이 휭 하고 불며 낙엽이 데굴데굴 굴렀다. 곧 동호가 여기에 없다니, 갑자기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넌 곧 여기 없겠구나.”
“응. 가족들이랑 이야기했어. 꿈이 다시 생겼다고 하니까 정말 좋아하시더라고. 열심히 해볼 거야.”
아쉬움과 서운함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못 보겠네.”
“응. 그래도 바다 너한테는 연락 자주 할게.”
내가 끝내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하자, 동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내 인생을 바꾼 사람이었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는데. 이제 곧 헤어질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동호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 이제 슬슬 가봐야겠다. 근데 바다야.”
“응?”
“나도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동호가 다시 가방을 뒤적이더니, 갈색 종이봉투를 꺼내서 나에게 쥐여주었다.
“지금 말고, 내가 가면 꺼내봐. 알았지?”
지금은 꺼내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며, 동호는 절뚝이며 멀어졌다. 몇 번인가 뒤돌아보며 내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나는 손을 흔들며 배웅하다가, 궁금한 마음에 얼른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 종이봉투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부스럭거리는 종이 사이로 금빛의 물건이 삐져나왔다. 메달. 그것은 메달이었다. 동호가 첫 만남에 보여준, 그리고 그 뒤로도 늘 품에 지니고 다니던 그 메달이었다. 정성스레 닦아놓은 메달을 보자 온통 정신이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동호야.”
나는 메달을 손에 쥐고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가장 소중한, 어쩌면 동호에게 있어선 인생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그 물건. 만약에 나였다면 바다와 맞먹었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그 물건을 나에게 선물한 의미를 알았을 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대문을 열고 뛰쳐나가 한 번 더 소리 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절뚝이며 걷던 그가 내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뜨거워지는 가슴 속의 감정에 이성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난 그만 온 힘을 다해 달려가서 그의 등을 와락 안아버렸다.
둘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심장 소리만 요동치듯 둥둥 울려댈 뿐. 나는 흐느끼며 그를 꼭 감싸 안았다. 
새로 시작한다는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서울로 가겠노라고 덤덤히 이야기하긴 했지만, 동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다시 도전하기로 한 뒤부터 항상 내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이 맴돌고 있었다. 난 잘할 수 있을까? 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내 마음속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동호는 자신의 허리를 붙잡은 내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 둘 다 잘할 거야. 괜찮아.”
동호 역시 눈물이 섞여 떨리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담담했다. 마치 우리가 잘할 거란 게 확실하단 것처럼. 안도감이 몰려오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때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나만 남아 가녀리게 빛나고 있던 마지막 가로등 불빛이 딱 하고 꺼지는 순간, 그가 휙 뒤돌아 나를 감싸 안았던 것이다. 바다와 같이 넓은 가슴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준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 애의 품이, 새까만 어둠과 함께 내게 와 닿았다.
고장난 가로등 아래에서 우리는 더 깊이 끌어안았다. 감사를 가득 담아서, 눈물 섞인 사랑을 담아서, 더 깊숙이 서로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겨울이 다 되어버린 추운 날씨였지만, 누군가와 다정한 체온을 나누고 있는 이곳에는 따뜻한 희망만이 가득했다. 우리는 확신했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이 소년 소녀가 오롯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으며, 결국 다 잘해낼 것이란 것을.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마음속에서 꺼내 다시 쏘아 올릴 준비를 하는 두 어린 어른의 곁에, 노란 달빛이 따뜻하게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