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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대신문
  • 오피니언
  • 입력 2017.10.31 16:20

더 성숙한 대학사회를 위하여
vita contemplativa

우승수 전 기자

vita contemplativa. 라틴어로 관조적(觀照的) 삶, 더 쉬운 말로는 사색적 삶이라는 뜻이다.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결핍돼있다. 결핍 정도가 아니라 박멸당했다. 돈, 명예, 술, 섹스 등의 향락적인 것들, 소모적인 것들에 의해 묵상의 시간이 짓밟혔다. 앞서 열거한 단어의 행위주체가 스스로라는 점을 명시했을 때 우리는 자기괴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세계와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지 않고 질주한다. 이를 볼 때, 본질적인 것에 대한 물음은 실존과 쾌락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이상적인 행위처럼 느껴진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틀 안에서 관조함의 고요를 누리는 이를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의 성공적 삶에 대한 희망으로 한껏 들떠있으며,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밭을 일굴 뿐이다. 당장의 성공을 갈망하는 끊임없는 달음박질은 집착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병철 교수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진단한대로 ‘성과주체’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에서 관조란 개념은 설 곳을 잃었다. 남들보다 명예로운 자리를 우선적으로 점령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경쟁력을 갖춰야만 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잘 살아남는 것만이 축복이며 진리다.
이러한 유전자는 부모에서 자녀로 고이 대물림됨으로써, 이 사회 전체가 한순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 목표 달성을 위해, 또한 심심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쳐야만 살아가는 느낌이 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진지한 물음이 필요하다. 질주가 아닌 관조가 필요하다. 방향을 잡기 전부터 내달려서는 안 된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섣부른 행동보다 오랫동안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그토록 꿈꾸던 진리의 상아탑에 입성한 여러분. 주어진 청년 시기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다니느라 분주하신가. 대부분의 경우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복잡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지치고 괴로울 것이다. 그럴수록 삶의 의미를 묵상하기 보다는 평범하게 잘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행복이라고 단정짓곤 한다. 하지만 저마다의 삶은 애초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만큼 갖가지 한계를 타고났다. 이것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는 너무나도 달라진다.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 궤도를 달릴 때 본인은 마냥 뒤처지는 것 같을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사색하며 갈수록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더 값진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특히 여러분이 자주 이용하는 대학 도서관에서 독서하며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것은 높이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아닌 든든하게 두발로 딛고 설 수 있는 반석을 발견할 수 있는 사색의 한 방법이다. 어떠한 직장을 다니고 어떤 가정을 이루든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길 바란다. 그것만이 공동체를 비롯해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외모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더 성숙하길 바라며, 여러분의 변신을 위해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