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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대신문
  • 입력 2018.03.12 21:32

사과의 윤리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본격화된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이 거세다. 문화예술계, 기업, 대학, 국회 등 온갖 분야에서 피해자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믿었던 정치인과 스승의 성추행 전력은 차마 믿기지 않고, 때로는 믿고 싶지 않기도 하다. 공인이기 전에 누군가의 어버이요, 배우자인 이들이 한참 어린 여성을 상대로 정말 그랬을까 의구심이 든다. 음모론, 합의설, 역차별론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드러난 어떤 사례를 봐도 한국 사회의 ‘젠더 폭력’이 적나라할 뿐, 피해자를 불신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딸 같아서, 격려 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가해자의 변명은 치졸하고 궁색하며 뻔뻔하다.

 사과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어떤 곳은 여직원과 회의나 회식을 피하는 ‘펜스룰’을 적용하겠다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차별이다.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를 태우는 격이다. 미투 운동은 어떤 자리에서도 젠더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약자들의 외침에 시민 사회의 양심이 ‘함께 가자’고 응답하는 것이지 성별, 지위별로 회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낮은 젠더 감수성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형태로 표출하는 데 동의해서는 안 된다. 각 기관별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젠더 폭력문제 해결 기구를 제대로 작동시킬 사회적 ‘안전판’을 새롭게 짜야 한다. 궁극적으로 미투 운동은 권력의 부당한 횡포로부터 인권을 지키는 운동이다.

 그 길에 가해자의 사과가 필요하다. 여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가정법을 취하지 말고 권력과 위계에 의한 폭력이었음을 ‘어렵게’ 인식하라.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사과 공연’을 연출하고 일방적인 ‘문자’로 사과했다고 생각하는 가해자의 젠더 감수성은 우리 사회가 바꾸어야 할 삐뚤어진 사과 방식이다. 성찰과 반성, 품격 없는 사과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용서를 구해 상대의 인정을 받는다는 단순한 원칙에 따르면 된다. 누구라도 미투 운동에 걸릴까 불안하다면 과거를 돌아보고 직접 사과할 일이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고령이든 관계없다. 피해자의 고발과 방관자의 연대에 가해자의 사과가 더해질 때 미투 운동은 다음 단계를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