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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정연진(인문학부)
  • 입력 2017.04.10 17:35

사람은 살 권리가 있는 동시에
죽을 권리도 있다

앤소니 브랜드는 불의의 사고로 폐가 망가져서 산소가 뇌에 전달되지 못한다. 그의 대뇌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그의 숨뇌(연수)는 아직 살아있다. 1993년 최고법원이 ‘앤소니를 죽이는 것이 법적으론 허용되지 않지만, 법적으로 그가 살도록 유지하는 것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누군가가 죽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첫 번째 판결이었다. 그 결과 앤소니는 굶어 죽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판결이 없었다면 앤소니는 오늘날까지 고통 속에서 살아갔을지 모른다. 고통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픈 것이다. 우리는 종이나 참치 통조림의 날카로운 곳에 살짝만 비여도 피가 나고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앤소니가 느낀 고통은 그것보다 2배, 아니 20배는 더 컸을 것이다. 병실에 누워 목구멍에서 위까지 관으로 음식을 주입할 때 그는 수면 마취도 하지 않고, 내시경 검사를 받는 것과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더구나 그는 아프다고 말과 반응도 하지 못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누리는 권리인 행복 추구권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가는 것이 진정 그에게 의미가 있는 일인지 한번 논의해볼 문제이다.

나는 앤소니의 안락사를 찬성하는 바이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의 인공호흡기를 때고 6개월 더 사신 사례가 있지만, 이것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가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앤소니 브랜드의 경우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소변을 배출하는 도관을 바꿀 때도 그는 고통에 반응하고, 그의 팔과 다리는 이미 뒤틀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비록 장애인으로서 삶을 연장할 수 있지만, 그의 남은 삶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안락사는 왜 불법일까?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살인자와 병자를 같은 취급하는 것이다. 이 둘의 죽음은 본질에서 차이가 있다. 아픈 병자에게는 존엄한 죽음이 필요한데도 이를 나라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 반면, 악독한 죄를 저지른 살인자도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둘 다 이치에 맞지 않는 ‘악법’이다. 사회의 악은 뿌리를 뽑아야 하고 그에 비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