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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장수정
  • 미역(美曆)
  • 입력 2016.11.21 19:31
  • 수정 2017.02.02 22:16

<사도세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간 영조와 사도세자

안녕 2주 만에 컴백한 미역이야! 대부분의 사람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유교가 엄격하게 지켜지던 ‘조선’에서 심지어 왕이 세자를 죽여 ‘부자유친’을 무너뜨린 사건이니까. 그래서 이 사건은 영조와 정조를 다룬 역사책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고,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다양한 시점의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그래서 이번에는 역사 왜곡이 많은 비극적인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려줄게.

<그들은 어찌 그리 서로를 미워했는가?>
2015년 9월 16일 ‘임오화변’을 다룬 <사도>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어. ‘임오화변’은 1762년(임오년) 7월 4일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야. 영화에서 이 사건은 사도세자의 광기와 부자갈등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며, 단지 미쳐서 죽은 게 아니라 왕을 죽이려 한 반역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하지만 이 영화의 내용 전부가 사실은 아니야. 실제로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매우 엄격한 왕실 궁중 속에서 살아갔어. 아버지 영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들을 매우 아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세자를 못마땅해하며 혹독하게 대했어. 9세 이전부터 세자는 영조를 만나기 두려워했고 아버지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했어.
 세자가 15세가 되자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 영조는 칭찬이나 격려는커녕 호통과 폭설을 했고 세자의 말마다 질책하며 신하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지. 심지어 홍역이 돌자 세자가 대리청정을 잘 못한 탓이라며 3일간 석고대죄를 시켰어. 그렇게 한창 힘이 들 때 홍역으로 누이를 잃고, 연달아 자신을 아껴주던 할머니와 정성왕후가 죽자 결국 사도세자는 미쳐버리고 말아. 하루에 궁녀와 내시를 많게는 6명을 죽이고, 궁에서 도망쳐 흥청망청 놀았어. 또한 의복을 입는 것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고 극도의 불안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지. 이내 두 사람 간의 갈등이 절정을 찍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내어 그에게 뒤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고, 세자는 신분을 폐위당한 채 그곳에 갇혀 아사하고 말아. 사도세자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근거는 없어. 다만 그의 방에서 수많은 칼이 나왔고, 방황의 행적들이 발각되자 이에 분노한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그를 죽이고 만 것이지.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

 

<남아있는 기록들>
‘임오화변’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 중에서 정조의 생모이며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회고록인 「한중록」이 있어. 여기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부자갈등과 그로 인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빚어진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영화 <사도>는 이 책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어. 이 책은 혜경궁 씨가 노론이었던 자신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썼다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 현재로썬 그때의 상황에 대해 가장 상세히 서술한 책이라고 볼 수 있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며 썼다는 「금등지사」는 임오화변이 노론에 의해 주도된 정치적 사건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어. 또한 정조의 종합적인 시각에서 쓰인 「지문」에서도 일부의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세자를 모함하였고, 소론의 일부도 호응해서 갈등을 만들어 세자의 지위를 흔들리게 했다는 설이 있어.
 그렇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는 것은 사실이야.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비극적으로 만든 것일까. 진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마치 세대 간의 갈등과 비슷해 보여. 평생을 왕위계승 적통성에 논란이 있던 영조는 아들을 완벽한 왕으로 만들려 했고, 그것은 곧 아들을 미쳐버리게 만드는 시발점이 된 거야. 하지만 그 어떤 이유에서든 너무나 슬픈 역사임은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