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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미디어센터
  • 칼럼
  • 입력 2022.10.03 22:53
  • 수정 2022.10.03 23:04

코끼리를 생각해

코끼리. 지금은 너무나 친숙한 동물이지만 이를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도 그랬다. 그가 코끼리를 본 것은 1780년 청나라에서였다. 한 번은 연경에서, 한 번은 만리장성 넘어 열하에서. 연암의 눈에 비친 코끼리는 이러했다.

소 몸뚱이에 나귀의 꼬리, 낙타 무릎에 호랑이의 발, 짧은 털은 회색이다. 어질게 생긴 모양에 슬픈 소리를 가졌다.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 같으며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이며 키는 한 발 남짓이나 되었다.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서 자벌레처럼 구부렸다 폈다 하며 굼벵이처럼 구부러지기도 한다. -상기(象記)

 뭐지 이 이상한 동물은?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씹도록 하기 위함이라면 어째서 씹는 데 방해되는 긴 어금니를 준 것이지? 지금까지 우리의 지식 범위나 경험 세계는 소·말·닭·개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이치라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나 용·봉·거북·기린은? 저 코끼리는? 청나라 사행에서 연암을 뒤흔든 것은 그 나라의 찬란한 문명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목도한 이 이상한 동물은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고 하늘의 뜻, 하나의 이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연암의 독특한 점은 이 이치를 관계의 문제로 끌어갔다는 것이다. 코끼리가 있고 범·쥐가 있다면 이 셋 중에 승자는 누구일까.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죽이니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코끼리가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 없어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서운 존재일까. 아니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이치는 없다. 관계 또한 일방적이고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다. 천하만물은 변화무쌍하고 우리 또한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은 무수한 차이들로 가득하다.

연암은 <상기>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성인이 《주역》을 지을 때 코끼리 상(象) 자를 취하여 지은 것도 만물의 변화를 궁구하려는 까닭이었을 것이라고. 코끼리를 통해서 연암은 우주를 읽고 변화, 흐름, 사이, 차이와 같은 사유를 발견해 냈다. 이것은 차고 딱딱한 시대―주자학, 북벌론, 소중화주의가 짓누르고 있던 시대에 용맹한 쇄빙선 구실을 해 주었다.

코끼리를 뜻하는 ‘象’이란 글자는 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원래 이 글자는 코가 긴 코끼리 모양을 그린 것이다. (왼쪽으로 90도 돌려 보라) 코끼리는 고대 중국 황하 유역까지 서식했었는데 이후 농경문화가 확산하면서 개체 수가 급감하여 보기가 귀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코끼리의 뼈를 가지고 원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했다고 한다. ‘상상(想像)’이란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연암이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상상은 변화의 다른 이름이고 연암 사유의 동력이다.

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게 인문정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런 말로 대신하고 싶다. 변화, 흐름, 사이, 차이, 공존, 가치의 재구성, 상상. 그러니까, 코끼리를 생각하라고, 연암이 코끼리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을 떠올리라고. 그리고 믿는다. 이 정신은 전쟁, 질병, 환경 위기, 각종 갈등과 격차로 숨막히는 시대, 그러면서 4차산업혁명, AI, 융복합 같은 새로운 도전과 기회로 가득한 이 시대에 대응하는 또는 이 세계를 지키면서 평화의 방법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나아가는 슬기로운 견인선이 될 것임을. 

코끼리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