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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미디어센터
  • 칼럼
  • 입력 2022.06.06 15:35

'저울 위의 성범죄'

역사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성범죄는 마치 몸 깊숙이 침투한 암세포처럼 자리해왔다. 권력 관계의 산실인 정치계, 정의의 칼을 쥔 법조계, 연예계, 대학 사회……. ‘겉보기만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인품’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어김없이 성(性)이 납작하게 대상화된 범죄가 일어난다. 

현대 사회의 ‘정의’는 종종 정의의 신이 들고 선 칼과 저울에 비유되곤 한다.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신인 디케는 오늘날 정의를 의미하는 단어 ‘Justice’의 기원이다. 그녀가 든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이며, 칼은 그런 기준에 의거한 판단과 정의 실현의 힘을 뜻한다. 

인간은 때로 무자비하고 잔혹한 짓을 저지른다.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를 무시하고 짓밟으면서도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지고의 고귀함을 제 발로 걷어차는 것과 같다. 내가 괴로운 일은 타인도 똑같이 괴롭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이치다. 적어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뉘우칠법한 행동도 수치심과 왜곡된 에고가 뒤엉킨 누군가는 못내 숨기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다. 급기야 '억울하다'는 간편한 탈을 뒤집어쓰고 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둘 모두가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해자가 호소하는 억울함과 피해자가 토로하는 고통을 저울에 달아보는 상상을 한다. 과연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애먼 일에 엮였다'고 주장하는 가해자 쪽? 아니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고도 증명할 길이 요원한 피해자 쪽? 당신의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많은 성범죄의 경우 애초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증거가 없기 때문에, 또는 수치스러워서. 80% 이상의 성범죄가 가족 친지 혹은 면식범에게서 일어난다. 그럴 경우, 남은 인생이 그와 엮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냥저냥 덮어두는 경우도 허다하다. 피해자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 라고 운을 떼기란 그토록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경청하는 법을 알지만, 실상 언제나 판단하며 듣는다. 내가 처한 상황, 사회적·경제적 지위에 따라 그 판단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그러니 '누가 정말로 억울한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를 옹호하고 싶은지'다.

저울에 달아본 가해자의 억울함과 피해자의 괴로움. 사실 이는 애초부터 그릇된 측정이다.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을, 그 사건을 판단하거나 저울질할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저울질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면, 부득이 그 저울을 파괴하기를 권한다. 성립될 수 없는 저울질은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힐 뿐이다.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정작 피해를 끼치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도 뻔뻔한 사람들이 있다. 제발 간곡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요청하고 싶다. 약자를 차별하지 말고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는 당연한 말들이 먹혀들지 않는 순간, 정의의 신 디케가 든 저울과 칼이 엄정한 표정으로 목을 겨누며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