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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명찬 상담심리치료학과 교수
  • 칼럼
  • 입력 2019.06.24 17:49
  • 수정 2021.03.12 11:31

[교수칼럼] 끝까지 살아남는 대학

우리 사회는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중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합계 출산률은 0.97명 이었는데, 이는 가임기 여성 1명이 낳은 신생아가 1명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치는 세계적으로도 최저 수준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구 구성은 대학정책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출산률이 높고, 젊은이들이 많게 되면, 즉 생산가능인구가 많을수록 고등교육 수요 또한 높을 개연성을 지닌다. 이러한 국민들의 욕구가 정책적으로 반영된 것이 1995년 5월 31일 발표된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이었다. 이때 학생 중심 ‘수요자 중심교육’이라는 구호 아래 교육을 경제논리로 환원하는 정책이 시작되었고, ‘대학정원 자율화’가 추진되었다. 이것은 고등교육 수요가 많았던 당시의 대중적 욕망을 반영한 조치 였다고도 보여진다. 그 결과 1996년부터 대학의 수, 그 중에서도 사립대학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어 2014년에는 300개에 이르게 된다(박풍휴, 『쓸모없는 아이들』). 

사립대학의 증가는 국가 재정을 많이 들이지 않는 전략을 통해 국민들의 고등교육 욕망을 채우려 했던 정부의 정책적 기조의 결과라 하겠다. 반면 출산률의 감소로 인해 단기간에 설립된 대개의 사립대학은 구조조정의 역풍을 맞게 되었다. 대학생 수는 2002년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한때 고등교육의 국민적 갈망을 채워주던 대학이 그 ‘쓸모’를 의심받게 되고, 퇴출의 대상이 된 것이다. 김영삼 정권은 5·31 교육개혁을 발표하기 1년 전인 1994년 ‘대학평가’를 도입했다(박풍휴의 같은 책). 즉 대학을 평가하여 차등적으로 국가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계획 아래에 대학설립을 용이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사립대학들은 국가의 재정을 지원받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해야만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우리 대학은 2018년 ‘자율개선대학’에 선정되지 못했다. 그 결과 정원감축의 권고를 받게 되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경우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각종 재정지원에서 제외되는 패널티를 받게 된다. 정부로부터 우리 대학이 과연 고등교육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대학인지에 대한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수록 인구가 줄어가고, 특히 대학에 가려는 입학자원이 줄어가는 이 시점에 피할 수 없이 받게 되는 질문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우리에게 물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 대학은 꼭 필요한 대학일까?”, “반드시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있는 대학일까?” 이와 같은 질문은 받기에 꺼림칙하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지금부터 곱씹고, 그에 응답할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질문에 답할 사이도 없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 우물쭈물 하기엔 남겨진 시간이 없다. 

필자는 올초부터 교육부에 지원할 ‘대학혁신지원 사업’ 계획서 작업에 참여했고, 지난 3월말에 마감하게 되었다. 국가재정지원사업은 우리 대학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시절은 지났고, 살아남는 게 최대의 과업이 된 시절이 왔다. 필자가 학생들에게 종종 하는 질문이 있다. “상황이 어려울 땐 자존심이 중요하겠니?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니?” 상황이 어려울 때 먼저는 살아남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심리적 존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았던 시절만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상황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령인구는 줄 것이고, 대학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 대학이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학이란 거대 조직은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닌, 집단의 지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는 대학이 될까?” 대안이 아닌 질문으로 갈음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