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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심효석(한국학부.16)
  • 기획/특집
  • 입력 2018.10.28 14:14

[운문 부문-당선] 공전, 잃어버린 계절

해바라기의 최면에서 깨어난 소년은
깨어진 거울 속 시선들을 피해
여름의 일기를 박 박 문질러 지웠다.
구겨지고 닳은 
한 장 한 장의 운치가
낙엽 소리와 닮아 있다고 여기며.

새로 산 공책에 공들여 적었던 일기를 
울며 차마 지우지 못하던 봄,
축축이 번져 버린 흔적들이
그칠 듯 그치지 않는 장마와 닮아 있다고 여겼던 걸
구름이 개고 난 뒤에야 비로소 떠올린다.

무엇에 홀려 있었을까

열꽃이 가라앉고
그 내용을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바스러지는 추위 속
모든 게 꺾여가는 능선에 앉아서야
어렴풋이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진 소년과 일기장,
둘을 안고 흘러가는 3월의 물소리

 

작품설명

사계의 순서대로 사랑의 모습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온도를 나타내며 일기장은 ‘나’가 그때그때 바라는 연애상을 정의하려 하는 강박을 나타내는 소품입니다.봄의 순수함이 주던 아픔, 아픔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행했던 여름의 모순,  성숙해지길 바란 계산적인 가을을 넘어 공백을 가지며, 한가지의 모습으로 정의하려하는 관계의 덧없음을 깨닫게 되는 겨울. 사계를 모두 겪고 난 뒤 비로소 일기장을 버리고 잃어버렸던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의 사랑을 다시금 찾으려 하는 화자의 성장을 풀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수상자 소감

부족한 작품을 좋게 읽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개인 시 책자와 전시회를 계획하던 과정에서 학과 선배에게 인제문화상에 대한 정보를 듣고 준비하던 작품 중 몇 작품을 빼내어 출품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엔 각 계절에 따른 연애상과 심정변화 외에도 진심이 어찌됐건 한 사람만을 꾸준히 좋아해야한다는 뜻의 ‘해바라기의 최면’, 그런 스스로를 더 이상 속일 수 없게 됐다는 ‘깨어진 거울 속 시선’, 각 이별을 겪고 난 뒤의 다음 계절(다음 연애에 바라던 상)을 암시하는 일기장의 상태 등 꽤 많은 비유를 담았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는 어린 시절 순수한 사랑과 이별에 상처받아 변해버린 소년이 이별에 직면 할 때마다 아픔을 잊게 해줄 다음 사랑을 계산하고 갈구하는데 자신이 매번 ‘바라는 연애 상’의 강박에 갇혀있으며 그것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늦여름에 그것을 자각하게 된 소년은 추워지는 가을과 모든 게 얼어붙는 겨울의 끝자락에서야 강박을 내려놓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마주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와 동시에 공전의 도착지인 다음 봄이 돌아오고 미성숙했던 소년은 성장하여 어른이 됨으로써, 강박을 적던 일기는 불필요해 짐으로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지 조금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현재의 저 자신이 이 시의 화자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적으며 저는 사랑에 관한 것을 떠올리고 전달했지만 전체적인 상징들과 플롯이 깨달음과 성장을 나타내고 있어 읽는 사람들의 심정에 따라 달리 해석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대로 읽고 느껴주시길 바랍니다. 지나간 이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심사평(김참 인문문화융합학부 교수)

23명이 보내준 69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작년에 비해 응모작이 많았고, 읽어볼 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다. 특히 리듬감을 살린 작품들이 예년보다 많아져서 좋았다. 응모작들을 여러 번 읽어본 결과 신강민, 신규철, 심효석, 김석후, 임지은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의 작품을 여러 번 정독하고나서 최종적으로 신강민과 심효석의 작품이 남았는데 어떤 것을 당선작으로 뽑아야 할지 꽤 고민을 했다.
 신강민의 <공산주의와 커피>를 비롯한 응모작들은 모두 좋은 작품이다. 신강민은 응모자들 중에서 시의 장르적 특성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공부가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들은 재기가 넘치고 개성적이고 무척 공격적이다. 주제도 선명하고 탄탄한 리듬감과 독특한 화법도 인상적이다. 시의 구조와 형태에서도 다른 응모작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안정감이 느껴진다. 게다가 같이 보내준 작품 설명을 읽어보면 인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소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신강민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고 싶었다.  
 당선작으로는 심효석의 <공전, 잃어버린 계절>을 뽑았다. 같이 응모한 작품들을 신강민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전체적 성취에서는 신강민의 시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심효석이 같이 응모한 다른 작품들은 당선작에 비해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다. 이 점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당선작으로 뽑은 <공전, 잃어버린 계절>은 신강민의 작품을 압도한다. 야구를 예로 들자면 신강민의 시들은 모두 삼루타고 심효석의 시는 일루타 두 개에 홈런이 하나다. 시는 자기를 표현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감정표현 문제가 무척 중요하다. 신강민의 시도 좋았지만 더 높은 성취를 기대해 본다. 이번 심사에서는 심효석의 짙은 감성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손을 좀 더 높이 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