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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한규 특수교육과 교수
  • 입력 2018.09.07 17:2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

개학을 앞둔 방학 끝자락에 태풍 ‘솔릭’이 찾아왔다. 태풍의 피해가 예상보다 크지 않았지만 제주도에서 한 여성이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그 여성은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던 중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경치나 보기 드문 광경을 보면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어 한다. 사진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므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사진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해서 추억을 되살릴 수밖에 없다.
내 마음속에 오래 동안 기억하고 있던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다. 그 경치는 내가 서너 살 되었을 무렵 때 보았던 것으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의 하나였다. 서너 살 무렵 나는 경북 안동시 북후면 옹천이라는 마을에서 살았다. 어느 봄날 아버지 손을 잡고 뒷산에 올라갔을 때 그 산은 온통 붉은 진달래로 뒤덮여 있었다. 이름도 없는 산이지만 그날 내가 보았던 불타는 듯한 산 경치는 그 뒤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내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약 15년 전쯤 어느 봄 나는 아주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직접 차를 운전하여 서울에 다녀오는 길에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중앙고속도로로 내려오다가 영주를 지나면서 불현듯 옹천 생각이 났다. 옹천 마을로 들어간 나는 옛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지만 어릴 때 살던 집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다시 보고 싶었던 산은 옹천역(지금은 폐역이 된 것 같다) 뒤쪽이었으므로 무작정 역 뒤로 돌아서 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결국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리고 말았다. 역 뒤에는 온통 쓰레기, 폐비닐 등이 널려 있었고 산 쪽으로 올려다보아도 그 산의 모습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경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 어리석은 짓으로 인해서 나는 수십 년 동안 간직해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잃고 말았다.
인지 심리학자 삐아제는 자기가 아기였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 기억에 의하면 삐아제의 유모가 삐아제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가면서 삐아제 어머니로부터 시계를 빌어서 차고 갔다. 산책 도중에 강도를 만났는데 그 강도는 유모가 차고 있던 시계를 강탈해서 달아났다. 삐아제는 그 장면을 오래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유모는 강도를 당하지 않았으면서 돌아와서 삐아제 어머니에게 강도에게 시계를 뺏겼다고 거짓말 한 것이었다. 삐아제의 기억은 유모가 어머니에게 거짓말 한 내용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기억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삐아제의 경우처럼 터무니없이 왜곡될 수 있으며, 그 정도는 아니라도 사진에 비할 바 없이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하기보다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봄날 옹천의 산 경치는 내게 기억으로 남겨져 있었기 때문에 오래 동안 아주 멋진 경치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기억은 포토샵이 잘 되기 때문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 그 경치에 몰입 한다면 이름 없는 산이나 평범한 바닷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경으로 저장될 수 있다. 주위에 널려 있는 쓰레기나 화면 한 구석에 서있는 원치 않는 불청객은 포토샵 처리 된 채로 말이다. 자, 연구를 위해서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사진보다 기억에 저장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