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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대신문
  • 입력 2018.08.13 15:33

투표불참은 중립적이지 않다

오늘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진다. 투표 참여를 권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뻔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투표권은 1948년 정부수립으로 자연스럽게 획득된 권한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뽑은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방자치제도도 1990년, 당시 김대중 총재의 13일간의 단식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투표권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피와 땀이 묻어있다.

투표에 참여하는 일은 민주시민의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것이 의무인지에 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어왔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적지 않은 나라들이 의무투표제를 도입하고 있다. 투표하지 않은 이들은 범칙금을 낸다. 대개 90%가 넘는 투표율을 기록한다. 우리나라가 이런 제도를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찍을 후보나 정당이 없다”거나 혹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투표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를 언급하며, 마치 그것이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인 것처럼 간주한다.투표하지 않는 행위 자체가 의도적인 ‘정치적 행위’일 때도 있다. 자유로운 경쟁과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형식상의 투표를 거부하거나, 투표율이 낮을 때 법률적 효력이 상실되는 주민투표제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투표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투표하지 않는 행위가 “나의 뜻과 상관없는”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는 점이다. 투표는 부의 소유 정도나 타고난 계급이 아닌 평등한 유권자 “다수에 의한 지배”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민주주의의 도구이다. 정치학자들에 의하면 특권층, 즉 불평등한 권한과 권력의 향유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사회적 강자들은 평등한 다수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해왓다. 깡패가 구경꾼을 의식해 으쓱한 곳을 선호하는 것처럼 기득권자들은 늘 갈등을 공론화하는 것을 막고자 하다. 선거는 갈등의 공론화 시키고 다수의 선택을 통해 이를 해결하는 가장 큰 정치적 공간이다. 따라서 정치혐오를 통해 투표불참을 조장하는 일은 반민주주의자들이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애용하는 수단이다. 한국의 보수정당들이 공공연하게 낮은 투표율을 기대하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 선거에 참여하는 자가 민주주의가 불완전하게 작동하기를 원하는 자기모순의 작태이기도 하지만 숨겨진 의도는 그것이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내 권리의 포기나 불투표의 자유를 누리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누군가에게, 즉 투표율이 낮은 게 이득인 세력에게 유리한 정치적 혜택을 주고 사회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당성이 부족한 권력을 만들어내게 되고 그 다수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는 권력이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 정치를 할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나는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나와 같은 이익을 공유하는 투표자들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정당이나 후보에게 투표하든 나의 무관심과 불참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손해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의도치 않게) 정치적 이득을 준다. 투표불참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점을 당부하고자 한다.

이번 6월 13일 선거의 사전투표일은 6월 8일과 9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