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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민아 기자
  • 입력 2018.08.13 15:12

아직 끝나지 않은 5월, 5·18민주화운동

장갑차, 헬기까지 동원
기록된부상자 852명
특별법 통해 8번째 진상규명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독재를 이어가던 박정희 전 대통령(5~9대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계엄령이란 국가비상사태 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군이 맡아 다스리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 인해 군은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막이 열린다.

 

군사 쿠데타와 짓밟힌 민주화

박 전 대통령 사후 하루 뒤인 10월 27일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앉혔다. 전 전 대통령은 본부장으로서 갖게 된 엄청난 권한을 수사에 사용하는 대신,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했다. 막 독재 정권에서 벗어나 민주화 실현을 열망하던 시민들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힌 순간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군권을 장악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노태우 전 대통령 을 비롯한 하나회라는 군부 사조직을 기반으로 국권을 탈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새로운 독재 위기에 직면한 시민들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교에선 ‘계엄해제’와 ‘유신잔당 퇴진’을 외쳤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5월엔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전국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이 10만 명가량의 학생들과 함께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과 충돌까지 일어난 상황에서 학생들은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고자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위에서 위협을 느낀 전두환 세력은 △제주도까지 계엄 확대 △각 대학 휴교령이 포함된 계엄포고 제10호 의결 △전국 55개 대학의 학생대표 95명 연행 △각종 언론사, 방송사, 대학 등에 계엄군 주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도시 한가운데에 투입된 군대

전두환 세력은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해 민주화 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제압했다. 전남대학교 교문으로 집결하는 대학생들을 방해하고, 반항하기 무섭게 폭력을 가했다. 민가에 들어가 젊은 남자라면 무조건 폭행 후 옷을 벗겨 연행하기까지 이르자 결국, 무자비한 제압에 따른 희생자가 나왔다. 최초 공식 사망자인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타당한 후 사망 판정을 받았다. 이는 시위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 대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장소를 옮겨 광주역에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의 규모가 커지자 군대는 장갑차, 헬기를 동원한 것도 모자라 발포까지 허용했다. 이때 사용한 실탄은 약 51만 2626발로 기록되어 있다. 총을 쏘고 최루탄과 가스를 살포하는 등 위협을 넘어선 제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금남로에 버스, 화물차, 택시 등의 200여 대의 차량을 끌고 와 전력에 더했다.

군대는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고 광주 시민을 고립시켰다.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주변 지역에서 무기를 확보했다. 격렬한 저항 끝에 군대는 잠시 물러났지만, 곧 시내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고 시 외곽에서 외부로 나가려는 시민들을 매복 사격하는 등 희생자를 늘렸다. 광주에선 군대에 의해 잇따른 희생자가 발생했고, 광주 밖 다른 지역에선 전두환 세력이 광주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조작 보도를 했다.

한편, 군대를 몰아낸 광주 시민들은 자체적인 수습대책위원회를 세워 광주를 이끌고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내부 혼선 및 스파이 교란 작전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최후의 항쟁과 민주화 운동이 불러온 바람

군대와 광주 시민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신경전은 5월 26일, 시위를 시작한 지 열흘 만에 막을 내렸다.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광주 시내에 진입했고, 도청을 지키던 시민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거나 연행되면서 마지막까지 광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발표에 의하면, 확인된 사망자는 193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수치가 아니며 이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청에 머물렀고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 1980년 5월 30일에는 서강대 학생 김의기 씨가 서울기독교 회관에서 투신하며 5·18민주화운동을 고발하는 글을 뿌리기도 했다. 노력 끝에 5·18민주화운동이 재조명된 것은 다시금 시민들이 민주화에 관심을 갖게 된 6월 항쟁이다. 그제야 광주청문회가 열려 5·18민주화운동 실상이 전국에 생방송됐다. 1995년에는 ‘5·18 관련 특별법’,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6년 전두환·노태우 및 관련자들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라는 죄목으로 약 2000억 원의 벌금과 사형 및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97년 특별사면을 석방되었고 관련자들은 제자리로 복권됐다.

5·18민주화운동은 6·25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당시 시민들은 군대의 무력에 졌지만, 독재 정권에서 벗어나 민주화 사회로 향하는 험난한 길의 기반이 됐다. 결국, 시민들은 이 의지를 이어받아 1987년 6월 항쟁에서 군부 독재를 끌어내리고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은 아시아 민주화 운동에 큰 희망을 줬고, 2011년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또한, 시민들은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의 등을 빌려 기대어 왔다. 부상자가 늘자 헌혈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시장 상인들은 시민군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시민들은 군대를 몰아낸 후 시내를 청소했으며, 치안이 극악이던 환경 속에서도 45개의 금융 기관 중 습격을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의 모범이 되었다.

 

2018년 5월 18일, 끝나지 않은 민주화 운동

5·18민주화운동은 38주년을 맞은 이 순간에도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과거에 7번의 진상조사가 있었음에도 학살에 대한 진상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 등 관련자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은 채, 피해자들은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수많은 왜곡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북한 개입설이다. 작년 4월 출간한 전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북한 지령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정치범을 해방하기 위해 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쓰여 있다. 이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을 희생시켰으면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허위사실이 36개 발견되면서 이 회고록은 출판 금지를 당했다.

2018년에 들어와 많은 사람이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부는 제대로 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지난 2월 28일 통과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하 5·18 특별법)’에 의해 오는 9월 15일에 8번째 진상조사가 시작한다. 진상조사에서는 민간인 학살 및 헌정질서 파괴행위 등을 조사하며 총 9명으로 구성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진행하게 된다. 진상규명 외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겠다는 공약을 지키겠다”고 강조했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5·18 등 온갖 사건을 다 넣으면 헌법이 아닌 누더기”라고 비판했지만 진상조사에 관해선 동의한 상태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 등 많은 정치인이 진상규명에 대한 뜻을 같이 하고 있으며, 38주년을 맞이하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작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했던 문 대통령이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과 정의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한 만큼 8번째 진상규명을 끝으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