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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대신문사
  • 입력 2018.03.28 18:31

그리는 사람과 부리는 사람

“내 너를 찾아 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미당 서정주의 말이다. “내가 혼자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세상을 떠난 너를 찾아왔느니, 너를 찾아온 이 거리에서 너는 생기 있게 다가오는 소녀들의 얼굴로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네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너무 단순해서 잊히기 쉽다. 당연한 것에는 관심조차 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단순한 사실 하나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상기(想起)의 순간이 있다. 시인은 “너”를 그리는 사람이 되어 “너”의 존재 자체에 몰두한다.
 ‘그리는 사람’이 되어본 사람은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리는 사람’이 되어본 사람은 자신이 타인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식조차 없다. 그러한 의식은 비중이 자신에게 있는 자의식으로서 자기이미지관리 차원의 이해타산과 결부되기 쉽다.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라는 계산은, “공공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태도로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건이면서도 ‘위선’으로 전락할 위험을 지닌다. 자신에게 별다른 해가 되지 않겠다싶으면 특히 내가 부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때로는 ‘위악(僞惡)’을 가장해서 내심 하고 싶은 대로 해버리는 추행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남을 부리는 사람, 남을 자신이 부리는 사람으로 보는 사람은 상대의 입지가 자신의 선의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타인의 존재 자체를 부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런 착각에 빠지지 않을 뿐더러 타인을 부린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운 심성이 시심(詩心)이다.
 시를 읽고 마음이 순화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다 한번 들먹이는 한때의 감상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 편의 시가 시심을 일깨워, 존재를 귀히 여기는 심성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대의 대세를 거스르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여성을 ‘성적 존재’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해온 고질적 풍토 속에서 ‘부리는 사람’의 위세가 사회각계에서 ‘성폭력’으로 표출되는바,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 내게도 자리 잡는 남성들의 희망의 ‘미 투(Me Too)’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