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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항전이냐 화의냐 그것이 문제로다
장수정 기자 | 승인 2017.11.27 17:39

안녕~미역이야! 벌써 11월 끝이 다가왔어. 겨울이 다가온 만큼 날씨도 상당히 추워졌으니까, 다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따뜻하게 입고 다니길 바라. 지난 제391호 미역 <최종병기 활>편에서 다룬 병자호란 기억나니? 오늘은 그 병자호란 속 자세한 이야기가 담긴 지난 10월 3일 추석 기간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 이 작품은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이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청의 대군을 피해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힘겹게 청군을 막아내면서 벌어지는 내용이야. 여기서 가장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대립이야. 그리고 이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조(박해일) 또한 중요하지. 하지만 본 영화에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어. 그럼 지금부터 우리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병자호란의 발발, 인조의 치욕
1623년(광해군 15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을 밀어낸 인조반정이 발발했어. 이후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곧바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추진했고, 후금은 그런 조선을 견제하고 있었지. 그러던 1627년(인조 5년) 1월 후금이 광해군을 위한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침입했고, 3월엔 평양까지 함락시켰어. 인조는 겨우 강화도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고 몇 가지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나서야 돌아갔어. 이후 계속해서 강대해지던 후금은 1932년에 ‘군신지의’를 강요했고, 이에 조선은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다고 판단해 후금을 적대시했어.
1636년(인조 14년) 12월 28일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다시 한 번 조선에 침입해. 영화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사실 인조도 가족들이 있는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했어. 강화도는 수군과 전함이 없는 청군이 접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거든. 그런데 강은 얼어서 배를 탈 수 없었고, 청의 군대는 순식간에 평양까지 내려오니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 하지만 그 대단하다던 강화도 요새도 1637년 1월 21일 청이 배 100여척을 동원해 강화도를 공략하니 한나절 반 만에 무너지고 말았고, 세자빈 강빈과 봉림대군이 붙잡혔어. 이는 남한산성에서 약 47일 간 버티던 인조가 성을 나오게 된 가장 큰 이유기도 해.
인조는 삼전도로 나와 청의 태종 앞에서 세 번 머리를 조아렸어. 이뿐만 아니라 명 대신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행하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청으로 보내는 등 11개의 조항이 담긴 항복조약을 맺었어.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약 60만 이상이 노예로 거래되었고, 대부분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

척화파와 주화파의 시작과 끝
1592년, 1598년(선조 31년)에 연이어 일어난 임진왜란의 후폭풍은 꽤 컸어. 그래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국력상실로 인해 사회복구사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1만 6000명의 북방군이 손실됐어.
한편, 만주 일대에서는 명의 국제적 명성이 나날이 추락하고 있었고 여진족이 세운 청이 엄청난 기세를 떨치며 세력을 키워나갔어. 그 무렵 조선은 오랑캐 청나라를 배척하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재조자소(再造字小)의식이 팽배했어. 그러나 그들과 달리 광해군은 명을 따르는 척 청과 싸울 군대를 보내면서 명의 비위를 맞추고 적당히 정세를 보고 청에 항복하는 등 실리적인 중립외교를 펼쳤지.
그런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왕이 된 인조와 조정은 배척론을 펼치기 시작했어. 결국 배후세력을 주의하던 청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자, 조정은 김상헌이 주도하는 항전파와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의파로 나뉘어 분열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돼. 영화처럼 청과의 항전을 주장하는 이들을 척화파(斥和派),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던 이들을 주화파(主和派)라고 해. 척화파는 오랑캐와의 화친은 절대 안 된다며 항전을 주장했고, 주화파는 일단 청과 화의하여 백성을 살리고 난 후에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지. 이들은 인조가 강화도가 함락되어 인조의 아내와 자식들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을 결심하기 전까지 대립했고,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며 통곡했지만 결국 청과 화의하는 것으로 결정됐어.
그런데 주화파와 척화파의 싸움은 남한산성에서 끝이 아니었어. 병자호란 이후, 척화파는 주화파가 오랑캐에게 자신의 나라를 바쳤다며 비판하고 매도했어. 영화 속 최명길의 말처럼 전쟁이 끝나자 주화파는 역적이 되어버린 거지. 주화파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탄압을 받았고, 결국 소론으로 갈라져 정치적으로 몰락했어. 반면 척화파는 학문적·정치적으로 주류가 되어 노론을 구성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

볼 수 없었던 것들
영화에서 최명길은 인조에게 청과의 화친을 계속해서 주장해.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화친을 주장한 건 아니라고 해. 병자호란이 발발한 같은 해 9월에 최명길은 싸움을 피할 계책을 준비하든지 아니면 공세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어. 덧붙여 만약 전쟁할 것이라면 청군이 내륙으로 들어와 큰 피해를 내기 전에 압록강변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했어. 그러나 인조가 척화파와 주화파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청은 이미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거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게 또 하나 있어. 김상헌이 대장장이 서날쇠(고수)에게 근왕병을 소집하는 밀서를 부탁하고, 그는 근왕병에게 전달하는 것을 성공해. 하지만 이미 승패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근왕병들은 밀서를 받았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서날쇠를 죽이려 들다가 청의 군대에 들켜 모두 죽고 말아. 그러나 이는 실제 역사와 매우 달라. 일단 영화에선 근왕병들이 47일 동안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보여주지만, 실제론 근왕병들이 출동했어. 가장 먼저 강원감사 조정호가 이끄는 근왕군 7000여명이 12월 17일에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함경감사 민성휘는 12월 27일 근왕군 7000여명을 규합하여 진군했어. 또한 충청감사 정세규는 인조의 밀서를 받고 즉시 근왕군을 규합하여 이틀 만에 공주에서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했어.
이외에도 많은 군대가 인조를 구하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향했지만 청나라 군대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어. 또한 왕군을 지휘할 책임이 있는 도원수(都元帥) 김자점은 경기도 양평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각 도에서 출동한 근왕병들은 합류하지 못한 채 청군의 별동대에게 각개격파당했어.
마지막으로 김상헌의 할복 자살 부분이야. 김상헌이 자살시도를 한 건 사실이지만 할복이 아닌 목을 매는 것이었고, 그런 그를 관헌들이 달려와 막았어. 이후 그는 남한산성을 떠나는 조정을 따라가지 않고 안동으로 낙향해 조정에서 은퇴했어. 하지만 1639년(인조 17년) 청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640년에 청으로 끌려갔고, 약 4년 만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고 해.

장수정 기자  jcrystal@oasis.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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