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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주현(교양학부) 교수
  • 오피니언
  • 입력 2017.11.27 16:57

늘빛관 '캣대디'를 추모하며

그는 ‘캣맘’이었다. 남자였으나 캣맘이란 표현이 자연스럽게 중문 근처의 고양이들을 거두었다. 자주 오후에 늘빛관 옆 중문 그늘막 벤치에 앉아 고양이를 바라보곤 했다. 고양이들은 그에게 다가와 슥 몸을 부비거나, 옆에 드러누워 훤히 뱃살을 보이는 것으로 깊은 신뢰를 표했다. 길고양이의 경계심을 아는 내게 그 광경은 신비로웠다. 그는 주로 캣맘만을 보아온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캣대디’였다. 그가 중문 고양이를 얼마간 돌봐 왔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와 이 건으로 말을 섞은 것은 두어 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물론 캣맘이 아니다. 집고양이도 아닌 길고양이를 온전히 거두는 수고를 감당할 만한 도량이 없기에 세상의 캣맘들을 응원할 따름이다.
그는 늘빛관 지하 컴퓨터 가게에 있었다. 2014년에 그 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연구실 컴퓨터가 고장 나 수리할 데를 찾다가 전화를 한 것이 계기였다. 그에게는 사소했던, 그러나 내게는 심각했던 증상을 보이는 본체를 들고 황급히 늘빛관에 가면 정성스럽게 고쳐주었다. 수리비를 받지 않으려 해 USB 몇 개를 샀다. 나중에 내가 컴퓨터를 새로 구입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실은 그럴 때가 넘었노라고 흘리듯 말했다. 진작 말하지 않은 것은 내가 그 고물 컴퓨터를 아끼는 듯해서였을까. 특별히 아껴서가 아니라 웬만하면 고쳐 쓰는 편이었을 뿐인데, 한편 장사꾼처럼 보일까 저어했을 마음이 읽혀 미안하고 고마웠다. 다음해에 그에게 물어 적당한 본체를 구입했다. 그 때쯤엔 컴퓨터에 관한 그의 말은 무엇이든 믿게 되었다. 그의 권유대로 조립한 컴퓨터에 익숙해졌고, 고장이 안 나니 더 이상 찾을 일이 없었다. 고양이들이 있으니 잘 있으려니 했다.
그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말투가 부드러웠다. 동그랗고 유난히 붉은 얼굴 탓인지 상대를 짧게 쳐다보는 편이었다. 이런저런 용무를 보는 학생들도 조급하지 않게 편히 머물다 가곤 했다. 함께 일하는 이도 비슷하게 느긋했다. 초로의 이웃 안경점 주인장과 더불어 모두 늘빛관 지하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드는 직업인이었다. 늘빛관에는 대기업 전자제품 판매점이나 화려한 안경점보다 소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들이 있는 편이 좋다고 여겼다. 캠퍼스에 넘치는 젊음만큼이나 나이 든 이들이 자아내는 안정감이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 봄 두어 번 가게에 갔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으나 잠시 자리를 비웠겠지 여기고 USB 몇 개를 샀다. 깨끗하게 단장한 늘빛관 지하에 안경점이 없어져 서운했지만 그 후로는 가지 않았다. 컴퓨터는 지진에도, 무더위에도 말썽 없이 돌아갔다. 그는 내가 딱 쓰기 좋은 컴퓨터를 주었다.
그가 올해 2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49세, 패혈증이었다고 한다. 너무 늦게 소식을 알았다. 늘빛관 학생들도 모르는 이가 더 많았다. 왜 그 때 안부를 묻지 못했을까. 늘 이 모양이다. 그가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마음 아파했을 사고가 떠오른다. 얼마 전 학생들이 집을 지어주고 아끼던 ‘에동이’가 차 사고로 죽었다. 에동이도, 길고양이도, 그도 없는 캠퍼스는 그만큼의 온기가 식었다. 때 이른 한파에 나뭇잎이 채 익지도 못한 채 서둘러 떨어진다. 겨울이 오고 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지만, 사람만 그러랴.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기억될 ‘장소’를 만든다. 캣대디였던 그가 남긴 장소는 그를 아는 이들에게 생명의 온기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누가 그의 자리를 채울까. 에동이를 그려 붙인 학생들일까. 이 글을 쓰는 게으른 손일까. 어쩌면 이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늘빛관이란 따사로운 이름대로였던 캣대디, 이호영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