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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관상이란

대군에서 왕으로, 수양에서 세조로

안녕 오랜만의 미역이야! 다들 잘 지냈어?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와서 정신없었지?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이 좀 더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들고 왔어. 2013년 9월에 개봉한 영화 <관상>을 알고 있니? 이 영화는 조선 초기 세조가 왕이 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아, 세조는 조선 제7대 왕으로 반정을 통해 왕이 된 인물이야. 그는 자신의 조카 단종을 유배시키고 왕위를 빼앗아 많은 신하를 죽인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그 내막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을까? 지금부터 알아보자.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세조(世祖)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 충녕대군이 왕이 되기 전까진 민가에서 자라다가 5살에 궁으로 입궐하게 돼.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다재다능했는데 특히 형제들 사이에서 무예가 가장 뛰어났어.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박식하지만 병약했던 형 문종과 달리 무예 실력이 출중하고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으며 사냥을 즐겼다고 해.

이후 세종이 그를 눈여겨보고 특별 지시를 내려. 바로 조선 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집·기록하고 종실(宗室)의 잘못을 조사·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관청 종부시의 ‘제조’로 임명해. 이때부터 세조는 본격적으로 정사에 참여하게 되고, 세종의 병환이 깊어지자 세자 문종의 대리청정을 옆에서 돕기도 해. 그런데 사실 수양대군에게는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이 있었고 그의 아우 안평대군도 왕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 하지만 성리학의 중심인 조선 왕실에서 뚜렷한 명분 없이 그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지. 세종도 이렇게 생각해서 일단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궁에서 떨어트려 놓기는 했는데, 병약한 문종과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걱정됐어. 그래서 세종은 죽기 전까지 자주 집현전 학사들에게 자신의 손자 단종을 잘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해.

계유정난, 쿠데타를 정리하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했어. 그러나 재위 2년 3개월 만에 문종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고, 1452년 5월 18일 그의 12살 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돼. 문종이 죽기 전 그의 충신 좌의정 김종서에게 단종을 부탁하며 그를 고명대신으로 삼았어. 그런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와 황보인 등 종친 세력들의 힘이 점점 커지자, 수양대군과 종친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어. 때마침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야심도 알게 됐지. 하지만 그는 영화에서처럼 매사냥과 활쏘기를 즐기면서 왕권에 욕심이 없는 이처럼 행동했어. 그리고 천천히 그의 세력에 한명회와 신숙주 등 핵심 인물들을 포섭하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지.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김종서 세력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 단종을 폐위시킨다는 역모 제보를 받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갔어. 그리고 무방비상태의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눕히고 그의 두 아들을 죽인 후, 곧바로 단종에게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해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찬성·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켜.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해.

대군에서 왕이 되기까지

여기서 세조는 천천히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명분을 쌓아가고 어린 단종을 점점 압박하기 시작하지. 그는 영의정을 대표하는 영의정부사, 경연을 주관하는 영경연사, 문관·무관 인사 담당인 판이조사·판병조사, 천문관측 담당인 영서운관사, 군권을 장악하는 병마도통사까지 역임하고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어. 대군이 이렇게 많은 관직을 차지한 건 역대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는 즉양대군이 왕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됐다는 증거야.

그리고 계유정난 이후 2년간 단종의 주변인들을 천천히 제거하기 시작해. 수양대군의 집권을 반발하던 단종의 다섯 번째 숙부 금성대군, 하나뿐인 누이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도, 단종을 낳고 죽은 현덕왕후를 대신해 어린 단종을 보살피던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마저 유배 보내고, 숙부 수양대군의 독주를 버티기 어려웠던 단종은 끝내 양위를 선언해. 그리고 단종이 양위를 선언한 1455년(단종 3년) 6월 11일, 수양대군은 드디어 왕의 자리에 올랐어.

단종복위운동의 발발과 결과

단종은 상왕으로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어. 1456년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단종 복위를 도모하려 한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인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 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이 주도하여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계획했어. 그런데 도모자 중 한 명이었던 김질이 실패의 두려움과 장인 정창손의 회유로 함께 세조를 찾아가 반역을 도모했음을 고백해. 결국, 관련자의 가족까지 모두 참수되거나 노비로 팔려갔어. 이 사건 때문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됐는데, 같은 해 9월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단종복위운동을 꾀했으나 이 또한 어이없게 들통나. 결국 노산군은 자신의 숙부 금성대군과 함께 사약을 선고받게 돼. <세조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 결국 단종이 17살의 어린 나이로 자살했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사인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해.

엇갈리는 평가

어쨌든 세조가 자신의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이렇게 냉혹한 인물로 평가되는 세조는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많은 서적을 편찬한 인물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어.

먼저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어. 1467년에 발발한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고, 직관체제를 실시해 전국을 방위체제로 편성하여 중앙군을 5위 제도로 개편하는 등 국방력도 단단히 다졌지. 그리고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을 폐지했지만 대신 공익적 서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고 학문을 발전시켰어. 세조 때 바로 조선 통치의 기본법인 <경국대전>과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 역사를 정리한 <동국통감>을 편찬하기 시작했지. 경제정책에서는 개국 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해 국가재정을 확충시켰고. 훗날 그가 죽기 전 과거의 일을 반성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해 불교 융성 정책도 펼쳤다고 해.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올라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신들을 죽이는 등 강압적인 철권통치로 나라를 다스렸고, 측근을 우대하여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 형성의 원인이 됐어.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세조는 1468년(세조 14년) 음력 9월 7일 그의 나이 향년 52세에 건강악화로 인해 승하했다고 해.

그런데 작년, 영조 때 그려진 세조의 어진의 원본을 똑같이 베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의 그림이 공개됐어. 궁금하다면 한번 검색해봐! 그런데 다들 깜짝 놀랄지도 몰라. 세조의 얼굴은 영화 <관상>에서 나온 것처럼 얼굴에 상처가 있지도 험악하게 생기지도 않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