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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學食> 멘델 정신
이동석 교수 | 승인 2017.09.11 19:04

그레고어 멘델(1822-1884, 62세)은 오스트리아의 식물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수도회의 수사이자 사제로서 소위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하여 유전학을 개척한 위대한 생물학자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렌 지방의 소읍인 하인젠도르프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년 시절부터 농사와 원예 일을 가까이하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았으나 지주가 시키는 강제노동으로 부친이 큰 병을 얻는 바람에 가계가 어려워져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22세부터 가톨릭 교단의 아우구스티노수도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됨으로써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났으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6세에 사제가 되고 수도원에서 수련 생활을 하는 중 과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이후 중등학교 보조 교사를 거쳐 29세 때 빈 대학교의 자연과학부 입시에 실패하고 정규 교사 임용 시험에 낙방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30세에 수도원장의 추천으로 빈 대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3년간 수학·물리학·화학·동물학·식물학 등의 자연과학의 제 분야를 공부했다. 33세에는 완두콩 해충에 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한 후 고향 근처 브륀(지금의 체코 브르노)으로 돌아와 15년간 국립 실과 학교에서 자연과학을 강의했다.
 그는 35세부터 교회에 속한 작은 정원에서 완두를 실험 재료로 삼아 7년 후인 42세에 이른바 ‘멘델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 실험을 진행하는 동안 인공 교배를 통하여 2만 8,000여 종의 식물 잡종을 얻었으며, 29,000여 개의 완두콩에 대한 형질을 조사하여 이를 바탕으로 유전법칙을 정리하는 등 정열적으로 실험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그의 연구 결과는 당시 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1900년대에 재조명을 받을 때까지 35년 이상 어둠 속에 묻혀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지 못하자 낙담하였고, 얼마 후 아빠스(Abbas, 수도원장)로 임명되자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내 자신의 실험에 만족하며 이 실험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드디어 20세기 초 여러 과학자들이 잇달아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고, 마침내 1915년 토머스 헌트 모건이 염색체가 유전형질을 전달한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을 유전학의 기본적인 법칙으로 제시함으로써 고전 유전학이 완성되었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순종의 대립형질끼리 교배시켰을 때 잡종 제1대(F1)에서는 우성 형질만 발현한다. 원래 ‘우열의 법칙’으로 불렸으나 예외가 많아 지금은 ‘우열의 원리’로 정정되었다. 둘째, 우성만이 발현된 잡종 제1대(F1)를 자화수분하여 얻은 잡종 제2대(F2)에서 1/4의 확률로 열성이 분리된다. 이를 ‘분리의 법칙’이라 한다. 셋째, 멘델이 선택한 7가지 대립형질 중 두 쌍 이상의 대립형질이 유전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현한다. 이를 ‘독립의 법칙’이라 한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진화론의 연관성을 연구하던 여러 과학자들은 자연선택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 자연선택으로 인한 진화의 자식세대 유전 근거를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진화는 후천형질이 아닌 유전자의 변화임도 발견하게 되었다. 현대 유전학에서 멘델의 유전법칙은 유성생식 과정에서 일어나는 염색체의 감수분열 결과로 명쾌하게 이해된다.
 멘델의 연구는 ‘관찰→가설 설정→실험→법칙 수립’으로 연결되는 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실험은 계획의 교묘함, 실험의 정확성, 탁월한 자료 처리 및 명쾌한 논리 전개 때문에 생물학 사상 최고의 실험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44세 때 자연과학 학회에서 자기보다 먼저 연구 결과를 발표한 사람들의 ‘식물의 교잡’ 연구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면서, “제시된 결과들 사이의 통계적 상관도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폭넓고 올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하는 엄격한 학자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 동료 수사들과 많은 지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당시의 주류 과학계로부터는 외면당했다. 47세 때 수도원장이 되면서 그의 과학 연구는 거의 종료되었으며, 51세 때는 교회 과세 법에 반대, 정부와 대립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불행을 겪기도 하면서, 말년에는 만성 신장병으로 고생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예견한 대로 멘델의 법칙은 화려하게 부활하였으며, 브륀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 곳은 ‘멘델광장’으로 불리게 됐다.
 멘델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사제가 되고서도 과학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고 오히려 고조되었으며, 끈질긴 학구열로 기어이 유전의 법칙을 찾아내고 말았으며, 당시에 학계로부터 연구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는 실망의 시기에도 수도원장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여 종교 지도자로서의 당당한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만년에는 신장병이 악화되는 고난 속에서도 머지않아 자신의 실험 성과가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예견한 낙관적 예지자였다고 하겠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멘델 정신을 상기하여 과학 연구와 신앙 생활의 등대로 삼음이 어떨까요!

 

임상병리학과 이동석 교수

이동석 교수  ijnews@inj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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