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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장수정 기자
  • 사회/문화
  • 입력 2017.09.11 17:41

두 얼굴의 진실, 광종

모두들 2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하하, 미역이오라! 갑자기 왜 사극말투를 쓰는 거냐구? 그 이유는 바로 이번엔 조선시대의 인물이 아닌 좀 더 과거인 고려시대의 인물을 다뤄보려 하기 때문이야.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방영됐던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麗)’라는 드라마를 본 적 있니? 이 드라마는 <보보경심>이라는 중국 소설이 원작이고, 극 배경을 고려 초 태조~광종 시대로 바꿔서 제목에 고려의 려(麗)자가 삽입됐어. 드라마의 전체적인 내용은 팩션(Fact+Fiction)이니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하지만 <보보경심 려>를 통해서 진짜 광종에 대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알아보도록 하자.

왕소에서 광종까지
고려의 4대 왕 광종(光宗, 925∼975/이준기)의 본명은 왕소로,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조민기)의 넷째 아들이자 3대 왕 정조(본명 왕요/홍종현)와는 친형제 사이야. 어머니는 충주의 유력 호족이었던 유긍달의 딸 신명순성왕후(박지영)이며, 당시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혼인한 총 29명의 부인 중 셋째 왕비였다고 해. 드라마에서도 왕자들이 참 많았지? 실제로 광종 형제만 25명, 누이가 9명이나 있었다고 해. 그리고 훗날 광종은 이복 동생이자 왕욱(강하늘)의 여동생인 대목왕후 황보씨(강한나)와 족내혼을 하는데,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외척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해.
광종이 왕위를 이어받기까지 그 과정이 참 복잡해. 943년 태조가 사망하고 장자였던 혜종(김산호)이 즉위하지만 외가의 가세가 약해서 왕위를 노리는 적대 세력들이 많았어.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자 왕위를 위협하는 왕규가 자신의 손자 광주원군(백현)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골적으로 암살 음모를 꾸몄어. 둘째 아들 왕요도 서경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해 호시탐탐 왕권을 노렸지. 왕소 역시 왕권을 노린다고 생각한 혜종이 자신의 적녀를 후궁으로 주며 그를 시험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그를 처리하지 못해. 결국 항상 신변의 위협 속에 살았던 혜종은 국정을 잘 살피지도 못하고 2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아. 그 뒤를 이어 광종의 형 정종이 왕규를 포함한 외척세력을 제거하고 즉위했으나, 그 역시 4년 만에 광종에게 선위한 후 숨을 거둬. 그렇게 왕소는 949년, 나이 25세에 고려의 4대 왕으로 즉위하게 돼.

광종 vs 호족, 개혁과 반발
광종은 즉위 초, 중국에서 연호를 받아 사용하던 이전 왕들과 달리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지어 스스로를 당당히 황제라 불렀어. 또한 호족들을 견제하지 않고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사실 그의 이러한 행보들이 호족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준비였다는 해석이 있어. 당시 광종은 당태종과 신하의 정치문답을 정리한 책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즐겨 읽었는데, 언젠가 호족들의 거대한 힘이 언젠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거라고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어.
그리고 957년(즉위 8) 드디어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반포하고 본격적으로 공신들과 싸우기 시작해. 노비안검법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억울한 자들을 선별해 이전의 신분으로 되돌려 주는 정책이야. 당시 이 개혁안은 백성뿐만 아니라 호족들에게도 굉장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어. 왜냐하면 호족은 자신의 군사력에 속한 노비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힘을 잃는 반면, 광종은 군역과 세금을 내지 않는 노비들이 양민으로 돌아가 국가재정 확충, 호족세력 약화, 왕권강화까지 이룰 수 있었거든. 광종에게는 꼭 필요한 1석 3조 정책이었지.
광종의 호족 힘빼기 작전은 계속됐어. 고려 초 관직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호족 무관이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문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의 인력이 부족했어. 그리고 고려의 제도들은 대부분 중국 제도를 본땄기 때문에 광조의 개혁을 위해선 중국의 정책에 박식하면서 호족과 무관한 이가 필요했지. 그런데 딱 마침 중국 후주에서 쌍기라는 인물이 고려사절단으로 왔다가 병에 걸려 체류하고 있었고, 광종은 바로 그를 스카웃해. 
노비안검법 시행으로 호족의 힘이 약해졌을 때, 쌍기는 임금의 조서를 짓는 한림학사로 중용되고 광종에게 당(唐)의 과거임용제도를 본 딴 과거제 신설을 건의했어. 과거제는 당시 호족들의 자제들로만 구성되던 권력을 분산시켰고, 시험에 합격한 이들을 신진세력으로 키워 개혁을 시도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현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 물론 호족들은 광종의 개혁정치에 도움을 주는 쌍기를 싫어했고. 정책시행 과정에 있어서 많은 호족들과 부딪혔대.

빛나거나 미치거나, 외로운 삶
현대에서 광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해. 그가 500년 고려왕조의 기틀을 잡은 왕이라고도 하고, 피의 군주라는 말도 있는데 내 생각엔 두 가지 다인 것 같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광종은 향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고려의 기둥을 세웠다고 봐도 돼.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풀어주고, 신하의 건의를 귀담아 듣고 고려시대를 넘어서 향후 900년간 유지되는 과거제도를 실현하기도 했지. 그는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롭고 자애로운 왕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신하들에게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왕이기도 했어.
960년(즉위 11) 3월 광종은 재정적인 여유만 있으면 왕보다 화려하게 입어도 되던 기존 신라의 관복제도에서 지위에 따라 관복색을 정해 구분토록 했어. 가장 높은 관직부터 차례대로 자색, 붉은색, 진홍색, 녹색 옷을 입게했고, 새로운 관료체제를 완성시켜 왕을 중심으로 한 조정 체계를 확립해.
<보보경심 려>에서 광종이 매우 무서운 왕이 되어 피의 숙청도 마다하지 않았지? 실제로 광종 즉위 후, 형제들 중 유일하게 죽임을 당한 이는 왕원(윤선우) 뿐이야. 그는 성격이 난폭했고 반역을 꾸미려는 뜻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약을 내렸다고 해. 물론 드라마처럼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건 사실이 아니지만, 자신의 왕권과 개혁에 반발하는 호족과 조카들을 많이 처형한건 맞아. 이복형이자 2대 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과 친형이자 3대 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가 올라오자 사약을 내리고, 자신의 아들인 경종조차 믿지 못하고 거리를 두곤 했어. 호족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어. 광종의 즉위를 가장 많이 도왔던 평주의 호족 박수경(성동일) 일가가 자신의 정책에 반발하자 그의 세 아들을 숙청했어.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박수경은 병으로 세상을 뜨게 돼.
이렇게 계속되는 모함과 숙청 가운데 965년(즉위 16) 광종은 그의 첫째 아들 경종을 태자로 책봉해. 하지만 부자간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경종은 태자가 되고나서도 혹시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했다고 해.
광종은 이름처럼 빛나는 개혁정책을 펼쳐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되지만, 훗날 뒤돌아보니 그 자리는 너무나도 고독하고 쓸쓸한 곳이었어. 그는 항상 주변인들을 의심했고,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줄만한 친구도 없었지. 결국 광종은 975년(즉위 26) 여름, 그의 나이 51세에 갑작스러운 병으로 외롭게 숨을 거두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