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장수정기자
  • 미역(美曆)
  • 입력 2017.05.29 15:10
  • 수정 2017.06.02 13:18

<최종병기 활> 병자호란이 야기한 백성들의 고충

반갑데이~ 미역이데이! 모두들 활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니? 양궁? 국가대표? 오늘날에야 인식이 많이 변했지만 옛날만 해도 전쟁에 있어 활은 동양의 주된 무기 였어. 그래서 그런지 활은 우리 한민족의 특별한 장기로 알려져 아주 옛날 기록에 도 활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 지. 오늘은 활을 주제로 2011년 8월 10일 에 개봉된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를 소개하려고 해. 이 영화는 조선시대 병자 호란을 배경으로 하여 활에 대한 이야기 를 풀어내고 있지.

이번 호에서는 본 영화를 통해서 병자 호란의 시작과 끝, 그리고 활에 대한 이 야기를 들려주고자 해. 하지만 몇 가지 고증 오류와 왜곡이 담겨있으니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병자호란(丙子胡亂)

병자호란은 정묘호란 발발 후, 병자년 1636년(인조 14년) 12월부터 1637년 1월 까지 9년 만에 다시 일어난 제2차 전쟁이 야. 병자호란의 계기가 후금에서 청으로 국호를 고치고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친명 성향의 조선을 무력화시키려고 했다는 견해가 있는데, 이와 더불어 당시 청나라가 식량 위기에 처해있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어.

이 전쟁에서 청나라 태종은 10만 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침공하여 단 7일 만에 안 주, 평양, 개성을 차례로 함락하고 한성에 도착했어.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인조는 왕 족들을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 으로 피신했지. 그러나 성에는 식량이 얼마 없었기에, 포위된 지 45일 만에 식량 결핍과 추위로 방어할 기력을 거의 잃게 됐어. 게다가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어  어쩔 수 없이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 하고 항복을 선언하게 돼.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활과 인물의 논란

주인공 남이(역 박해일)는 활을 굉장히 잘 쏘는 신궁으로 나와. 그런데 극 중 남이의 화살 깃을 살펴보면 깃이 두 개인 화살을 쓰고 있어. 하지만 당시 조선과 청나라는 깃이 세 개인 화살을 사용했다고 해. 이는 고증의 오류야. 그 시대의 조선과 청나라 는 주로 바람과의 마찰에도 방향을 일정 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화살 깃이 세 개인 걸 썼거든. 깃이 두 개면 바람 때문에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쉬웠기 때문이야.

또한, 영화 속에 ‘도르곤’이라는 청나라 황자가 남이에게 죽게 되는데, 실제로 도 르곤이라는 황자가 병자호란에 참전했던 건 사실이나, 그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청 나라로 돌아가 훗날 청 태종이 죽은 뒤에 황제가 돼서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해.

돌아오지 못한 백성들

영화 끝에 ‘1637년 병자호란 후 50만 명 의 조선인들이 인질과 포로로 끌려갔지 만, 나라의 송환 노력은 없었지만, 소수만 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왔다’라는 자막이 떠. 물론 당시 짧은 기간의 전쟁 이었음에도 전쟁포로로 수십만의 조선 백 성들이 청으로 끌려갔어. 하지만 조선 정 부가 포로 송환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 은 건 아니야.

병자호란 이후 청과 조선이 맺은 조약 중에는 ‘청에서 도망친 조선인 포로를 다 시 돌려보내라’라는 게 있었는데, 이를 어길 시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으름 장도 놓았어. 조선 측에선 최후의 방법 으로 속환(贖還: 몸값을 주고 귀국) 외교 를 실시했으나, 고위층 사람들이 비공식 적인 루트로 거래를 이어가자 몸값이 폭 등하여 조선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졌 어. 더불어 일반 백성 중에선 가족의 몸 값을 준비하다가 파산하는 이들이 증가 했고, 포로 송환은 조선의 경제적 위기까 지 이어졌지. 이에 점차 포로 송환이 ‘개 인적인 일’로 치부되어 조선 정부는 더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 지 않았고, 그들은 생계유지의 어려움으 로 다시 청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아졌다 고 해. 결국, 백성들만 전쟁의 극심한 피 해를 보게 된 안타까운 사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