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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동석 교수
  • 입력 2017.04.10 17:39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선여인동(善與人同)

호연(浩然)이란 넓고 깨끗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고로 ‘호연지기’는 크고 넓게 뻗친 깨끗하고 힘찬 기운이라는 뜻이다. 맹자(孟子)는 호연지기란 의(義)와 도(道)라는 방향성을 가진 기운으로서 의가 쌓여서 생기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사람에게 닥쳐와 사람으로 하여금 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의와 도와 합치되지 못할 땐 위축되고 마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본래 호연지기는 마구 생성시킬 수 없으며, 억지로 기를 수도 없는 것이다. 오직 도를 말미암아 의를 행하여 날로 쌓고 달로 쌓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몸에 살이 쪄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 이에 빈천(貧賤)이 그 마음을 근심하지 못하게 하고 위무(威武)로도 굴복시키지 못하여, 기(氣)가 하늘과 땅에 가득 차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맹자는 경계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일이 있을 때에 미리 기필 하는 바를 설정하지 말고, 다만 마음 속으로 바르고 곧은 도리를 잊지 말고, 절대로 자라기를 도와서 ‘알묘(揠苗)’의 병을 범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호연지기를 기르는 법이다. 뜻이 깊고도 묘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청나라에 항거하다가 순절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현손이며 북벌론의 주역인 병조판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현손부로서 호연지기를 함양하여 실천한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호연재(浩然齋) 김씨(金氏, 1681~1722, 42세)이다.

벽상청룡공자명(壁上靑龍空自鳴) 하시용갑적군영(何時涌匣適群英)

승풍쾌도장강거(乘風快渡長江去) 살진군흉복대명(殺盡群匈復大明) -<청룡도(靑龍刀)>

벽 위에 청룡이 속절없이 혼자서 우니/ 어느 때에야 칼집에서 나와 여러 영웅을 만나려나/ 바람 타고 통쾌하게 장강을 건너가/ 흉한 적들을 다 죽이고 대명을 회복할까.

그가 이 시에서 명나라를 회복하겠다고 한 것은 고조부의 복수를 다짐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문충공의 현손이자 동춘당의 현손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여성일지언정 담대한 호연지기를 잘 보여주는 것이리라.

취후건곤할(醉後乾坤濶) 개심만사평(開心萬事平)

초연와석상(悄然臥席上) 유락잠망정(唯樂暫忘情) -<취작(醉作)>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즐겁기만 해서 잠시 정을 잊었네.

여성이 술 한 잔 마시는 때는 당시 사대부 집안 규수로서 잠시나마 엄중한 규범에서 일탈하는 시간으로서 당호(堂號)대로 호연지기를 더욱 체감했음직하다.

‘선여인동(善與人同)’이란 ‘선을 남과 더불어 행한다’란 의미다.“자로(子路)는 사람들이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주면 기뻐하였고, 우(禹)임금은 선언(善言)을 들으면 절을 하셨다. 위대한 순(舜)임금께서는 더 훌륭하여, 선을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행하셨다. 자기를 버리고 사람들을 따르시며, 사람들에게서 취하여 선하기를 즐기셨다.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이에서부터 제(帝)가 되기까지 사람들에게 취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들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함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군자(君子)에게는 사람들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맹자는 설파하였다. “선여인동(善與人同)의 ‘與’는 허(許), 조(助)와 같다. 저들의 선을 취하여 나에게 행하게 되면, 저들은 선을 행하는 데 더욱 힘쓸 것이니, 이는 내가 저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선을 행하도록 힘쓰게 만들 수 있다면, 군자의 선으로 이보다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맹자의 제자 공손추(公孫丑)는 크게 공감하였다.

인제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인술제세(仁術濟世)·인덕제세(仁德濟世)’로서 교명 ‘인제(仁濟)’는 ‘어짐으로 세상을 구하자’라는 숭고한 뜻을 담고 있다. 호연재 김씨는 여성으로서 가정교육만으로도 충만한 호연지기를 기르고서 여성을 넘어서려 했던 여장부로 호연한 기품을 유지하며 많은 창작 활동을 하고 학문을 즐겼다. 한편 그녀는 30명이 넘는 가속(家屬) 노비들을 거느리고 빠듯한 집안 살림을 반듯하게 통할하는 가운데 선여인동을 실천하면서 길지 않은 삶을 대차게 살다 갔다.

혼란의 시절 학문의 전당 인제학당에서 만나 교수(敎授)와 수학(受學)을 행하는 우리 인제가족은 교학상장(敎學相長)하며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우(愚)를 범하지 않고 호연지기를 함양하여 인술제세·인덕제세의 기치 아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선여인동에 매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