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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선웅(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국장
  • 입력 2017.03.27 20:15

공감과 평등

당신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커터 칼에 손을 베여 아파한다. 당신의 반응은? 아파하는 친구를 달래든 상처를 지혈할 물건을 가져다 주든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친구가 느끼는 고통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종종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곤 한다. 누구든 피 흘리는 사람을 보고 가슴 아파할 수 있다고 믿고, 빈곤에 허덕이는 이웃의 처지를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 손을 내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으로 당신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비교를 해 보자. 극단적인 예시다. 세월호 사건으로 사망한 304명을 떠올려 보자. 그 다음엔 시리아 내전으로 지난해 사망한 650명 이상의 어린이를 떠올려 보자. 세월호 사건으로 사망한 고등학생들과 교사와 여행객들에게 느껴지는 슬픔과 시리아 내전으로 사망한 어린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이 같은가? 같지 않다면 어느 쪽에 더 슬퍼지는가. 세월호 사건 사망자에게 더 큰 슬픔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시리아 내전 사망자들은 우리 국민이, 우리 민족이 아니다. 거기서 공감의 차이가 발생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의 고통에 평등하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는 당연한 일도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조차 지금으로부터 200년 조금 더 전이었다. 일례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기 이전인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었고, 여성에 대한 공감이 없었으므로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대우받는 일은 불가능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깊이는 보통 고통받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 옅어진다. 저기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과 다른 인종이라고, 다른 국가의 국민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말이다. ‘사람이 죽어간다’와 ‘다른 나라의 사람이 죽어간다’라는 두 인식은 명백히 다르다. 과연 그런 인식을 가진 채로 우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물며 굳이 세계로 범위를 넓히지 않아도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여성에서 시작해서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특정 세대에 대한 배척과 혐오……. 그 모든 일은 이들이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똑같이 고통받고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어난다. 이는 곧 차별로 직결된다.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 모든 인간이 자신과 같으며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은 다른 모든 인간 역시 할 수 있고, 내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앞서 말한 예시처럼 그저 다른 국가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감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으며, 평등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주창했음에도 여전히 젠더, 소수자 문제는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애초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를 만족시키는 건 굉장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모두 조금 더 노력해 보자. 나와 성별이 사는 곳이 소득 수준이 학력이 다른 그 어느 누구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대하고 똑같이 공감하도록. 그런 의식적 노력에서부터 평등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