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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逆鱗)>
왕의 역린을 건드리다

Hey 모두들 안녕~ 내가 누군지 아니? 미역이야! 오늘은 정조 암살 사건 ‘정유역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해. 2014년 4월 30일에 개봉한 ‘역린’이란 영화를 본적 있니?

영화 얘기하기 전에, ‘역린(逆鱗)’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해줄게! 역린은 ‘거스릴 역’과 ‘비늘 린(인)’으로, ‘용의 턱에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이야. 옛날 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의 ‘한비자’라는 사람의 유명한 말인데, “용은 가까이 길들이면 탈수도 있는 상냥한 짐승이다. 그러나 턱 밑에는 비늘이 거슬러서 난 것이 하나 있는데, 만일 이것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그 사람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만다. 군주에게도 또한 이런 역린이 있다”라고 저서에 남겼어. 그래서 오늘날에 ‘군주의 노여움’ 혹은 ‘건드리면 반드시 화를 입음’을 역린에 비유하여 말하게 되었지.

‘역린’이란 영화는 그 제목답게 왕을 노여움을 산 ‘정유역변(丁酉逆變)’이 진행되는 긴박한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자, 지금부터 그 전말을 알아보러 가자.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는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가 돼. 그리고 1776년에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어. 그는 즉위 동시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해 그 자리의 모두를 당황시켰는데, 이는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며 정조의 즉위에 반대하는 노론 세력에 정면 대응한 것이었어.

다만 그는 덧붙여서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라고도 얘기해. 사도세자를 높이고 싶기도 했지만,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을 언급하는 자는 왕명으로 처단하라고 남긴 유훈도 어길 수 없는 노릇이었거든.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자들에게 사법적 응징을 가하면서도 사도세자를 높이려드는 자들을 처단해. 노론과 척을 지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한거지. 그리고 사도세자라는 이름 말고 ‘장현 세자’라 존호를 올리고, 묘소와 사당을 영우원(永祐園)과 경모궁(景慕宮)으로 격상시키는 추숭사업을 진행했어.

 

정유역변의 진상

정조의 이러한 행보는 훗날 암살 위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돼. 영화 ‘역린’에서는 정조(역 현빈)가 이 암살 작전을 사전에 듣고서 지붕에 군사를 대기시키고 마당에서 반란군과 큰 싸움판을 벌이지만, 이는 사실과 완전히 달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정조가 즉위한지 1년인 1777년 7월 28일 궁궐의 가장 깊은 왕의 침소 ‘존현각’에 자객 둘이 숨어들어. 그리고 마침 정조는 서적을 읽고 있다가 회랑 위에서 나는 정체모를 소리를 듣고, 도승지 ‘홍국영’을 불러 궁을 수색했어. 그러자 범인들은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 두려움을 느꼈고 궁 안에 깊숙이 숨어서 잡히지 않았어. 이후 정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보름 뒤인 8월 11일 자객이 다시 잠입을 시도하기 위해 담을 넘는데 허무하게 발각되고 말아. 영화에서는 정유역변이 일어난 24시간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이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 된 건 보름 뒤였지.

그리고 자객의 자백은 매우 충격적이었어. 앞서 얘기했듯이,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자들에게 사법적 응징울 가하면서 유배를 보낸 노론당의 ‘홍술해’의 자식인 ‘홍상범’이 불만을 품고 자객을 양성해 반역을 도모했다는 거야. 뿐만 아니라 궁 안에 많은 호위군관과 상궁, 환관들이 홍상범에게 매수되어 왕 암살 작전에 참여했다고 진술했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정조는 반역 가담자들을 유배 보내거나 사형시키고, 주모자 ‘홍상범’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책형을 내렸어. 이 사건은 정조가 자신의 외척들을 물리고, 탄탄한 왕권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