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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이 행
  • 학술1
  • 입력 2016.06.07 16:47

왜 민주주의인가?

이 시대의 대학을 생각하여 - 이 행 교수

개교기념특별기고
dpsdhl@inje.ac.kr
탐진관(D동) 507호
Tel. 055-320-3443

 

 

 

 

 

 

 

◈ 학 력
1989년 미국 University of Southenr California 정치학 박사
1983년 미국 University of Southenr California 정치학 석사
1980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 연구분야
정치 이론
◈ 경 력
前 인제대학교 부총장
경남정치학회 회장
University of Hawaii Visiting Scholar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Visiting Scholar
한국정치학회 이사
아태재단 자문교수
Marquis Who's Who 등재
◈ 발표논문
새마을 운동의 정치사회적 조건 <한국정치학회>
민주적 공고화와 아시아적 가치 <21세기 정치학회보>
Uncertain Promises: Post 1987 Democratic Consolidation in South Korea in E.
Friedman (ed), The Politics of Democratization: Vicissitudes and Universals in
the East Asian Experience. (Boulder: Westview Press)
경남복지공동체를 위한 정책 제언 <보건과 복지> 외 다수

 

I.
대학이 몸살을 앓고 있다.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서양의 유구한 학문적 전통은 접어두더라도 진리를 탐구하고 근대 국가의 초석을 놓는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서의 대학의 시대적 사명은 과거의 희미한 자취로 남았을 뿐 시장의 무게에 짓눌려 숨 가빠하고 있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대학 평가의 주요 잣대로 인용될 만큼 높은 청년 실업률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했고 그에 걸맞는 대학의 변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거세다. 최근 결과가 공표된 교육부의 프라임 사업은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기술인력의 배양을 위해 대학 내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정원을 줄여 공학 계열의 정원을 늘리기 위한 정원 이동을 골자로 하는 사업이다. 20여 년 전에 누구나 이미 예견할 수 있었고, 또 예견되었던 인구학적 변동에 따른 입학 자원의 감소와 대학 입학 정원 사이의 불균형에 따른 위기 상황에서 대학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현실이기도 하다. 학교법인으로부터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고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여 학교를 꾸려가야 하는 지방 사립대학의 현실은 더욱 절박하다. 그들은 대학의 시대사적 소명과 유구한 학문적 전통은 뒷전에 둔 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구조조정과 정원이동을 통해 대학의 변신을 모색한다.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약 생존에 성공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고 어떤 이상을 지향하는 대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생존이 전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의 질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현재의 위기에 대응하는 단기적이고 대증적인 처방으로서의 자구 노력이 아니라 대학의 건학이념에 부응하고 장기적인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비전에 입각하여 추진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다양한 대학 공동체 구성원들의 적극적 참여와 의사소통을 통해서만이 대학의 혁신과 발전을 위한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 리더십이 절실한 시기이다.

21세기의 키워드는 민주주의이다. A. 센이 잘 표현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는 이제 컴퓨터의 디폴트(default)처럼 구체적으로 부정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보편적 가치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는 여기까지,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민주주의를 둘러싼 온갖 논쟁과 갈등이 고개를 쳐든다. 그것은 크게 보아 두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하나는 민주주의에 내재한 긴장과 패러독스의 산물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게 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이글은 그러한 순서에 따라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적 청소작업을 통해 민주주의에 내재한 긴장과 난제들을 추적한 후 III 절에서는 민주주의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야기되는 긴장과 도전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21세기의 시대적 도전과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있어서 왜 민주주의가 필수불가결의 지침이어야만 하는가를 현재 대학이 처한 위기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예로 들어 논의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할 것이다.

 


II.
민주주의는 B. C. 5세기경 아테네에서 모든 폴리스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공적 관심사를 논의하고 집정관을 추첨으로 선출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민주주의는 어원을 따지자면 인민(demos)과 권력(kratos)의 합성어이니, 인민의 권력, 혹은 인민의 지배(rule)를 의미하는 단순 명쾌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 주권(popular sovereignty), 치자와 피치자를 동일 시 하는 자치(self rule)는 민주주의에 내재적인 것이며 오늘날의 근대민주주의까지 존중되는 원칙이다. 주목할 것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정치 체제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했던 전제 조건이다. 무엇보다 먼저 동질성의 문제이다. 폴리스에 운집한 시민들은 노예제에 의존해서 사적 경제활동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공적 관심사에 시간과 힘을 쏟을 수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단일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비교적 동질적인 집단이었다. 다음으로는 배타성의 문제이다. 아테네의 인민은 전체 인구의 10-20퍼센트에 불과한 성인 남자 집단이었다. 당연히 여성, 노예, 미성년자는 제외되었다. C. 슈미트의 지적처럼 정치의
본질이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면 민주주의 역시 이러한 경계를 전제하는 배타성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민주주의의 인민 주권은 누구나 귀속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배타적인 범주로서의 인민에 의한 지배이다.


치자와 피치자를 동일 시 하는 자치가 민주주의의 수평적인 차원이라면 동시에 민주주의의 권력, 지배라는 의미에 함축되는 수직적 차원이 있다. 권력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혹은 힘으로서의 적극적인 개념이다. 일인에 의한 지배 체제인 독재와 마찬가지로 인민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민주주의에도 여전히 지배와 복종이라는 권력의 차원이 존재한다. 독재가 일인에 의한 지배이며 권력이 남용되고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개연성이 상존하는 것이라면 독재의 반대로서의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혹은 다수에 의한 지배이며 인민에 의한 권력이 남용되고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개연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더욱 치명적인 것은 인민의 권력은 최종 심급(審級)이기 때문이다. 인민의 권력을 제어하고 견제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권력에 대한 제동장치를 찾는 데에는 2천 여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근대에 탄생하게 된 개인과 함께 시작되었다. 17, 8세기의 사회계약론자들이 주목하는 것처럼 근대적 개인은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inalienable rights)를 갖는 정치적 주체이다. 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나 남용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최후의 방파제로서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가 고안됨으로써 근대민주주의를 위한 초석이 마련되었다. 근대민주주의는 인민주권과 자치를 내세우는 고대의 민주주의와 보편적인 인권
(human rights)을 내세우는 근대적 자유주의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민주주의의 긴장과 역설은 바로 이점에 기인한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때문에 배타적 경계를 내포하게 되는 인민의 권력행사에 대해 개인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는 상징적 틀로서의 자유주의적 담론이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근대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긴장과 역설이 바로 그 스스로의 존재 조건이며, C. 무페의 지적처럼 그러한 제한은 인권이 주어진 시점과 상황에서 어떻게 정의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것은 당시의 지배적인 주도권의 표출이며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는 반본질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관계를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라도 하나의 원칙이 표출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원칙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감염”이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체 만들어지는 “타협”의 관계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양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원칙을 내세우기 위해 상대방의 원칙과 경합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고대의 격투기에서처럼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경합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는 상대방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과 같다.

 


III.
민주주의의 고양된 이상과 가치에 대한 부풀려진 기대는 실망을 낳기 마련이고 그것은 결국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환멸을 초래한다. 왜 민주주의의 현실적 조건을 냉철하게 따져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앞 절에서는 근대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필연적 긴
장과 지배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권력의 차원에서 파생되는 역설을 살펴보았다면 이 절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만들어지는 구조적 제약요인과 도전을 논의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근대민주주의는 근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로 태어났다. 전자가 봉건제적 신분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면 후자는 오랜 기간 인류가 생존을 위해 익숙해 있었던 농업사회의 해체였다. 물론 양자가 독립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역사 발전과정의 양 측면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에서처럼 농업사회가 해체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시민혁명을 통해 탄생한 근대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와 쌍을 이루게 되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농민혁명의 경로를 통해 성립된 중국과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권의 경우는 사유재산제도에 기초한 시장 경제 체제 대신에 계획 경제 체제를 실험하였으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그러한 실험은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거나 물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생적으로 근대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는 쌍을 이루어 태어났지만, 양자를 조직하는 규제적 이상(regulatory ideals)과 지향점이 서로 잘 부합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불협화음이 필연적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뿌리를 둔 인민주권과 자치, 그리고 개인의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양도 불가의 권리로서의 인권이 전자의 전유물이라면 무자비할 수도 있는 탐욕과 경쟁에 기초한 “사적 이익”의 추구는 후자의 것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시장의 도전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침식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의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뒤르켐이 오래전 지적한 바와 같이, 전통사회의 “기계적 연대”가 도시화, 산업화에 따라 사회가 복잡화되고 노동 분화가 증가함으로써 “유기적 연대”로 바뀌게 된다 (기계적, 유기적이라는 표현이 약간의 혼동을 초래하기는 하지만). 전자는 공통의 경험과 믿음에 기초하여 개인적 삶이 억압되고 관습적 삶이 중요시되었던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노동 분화의 증가에 따른 전문화와 사회경제적 다양성의 증가로 인해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커지면서 만들어진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전통적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연대가 기계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면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 생성되는 개인 간의 연대는 공동체적 맥락을 벗어나서 경제적 상호의존성의 필요에 따른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적인 인간관계에 의해 구축된 공동체적 신뢰는 시장 사회가 등장하고 발전하면서 그 기반이 침식된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확인할 수 있었던 공동체적 환경 하에서 작동했던 아테네 민주주의의 인민주권과 자치의 이상이 경제적 상호의존에 의해 만들어지는 유기적 연대의 맥락에서 적용될 때 공공의 관심사인 정치 행위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시민적 특권이 아닌 개인적 비용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점에서 바로 합리적 행위자에 의한 무임승차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고대 아테네인들이 이디어트(idiot)라고 경멸해 마지않았던 사적 이익에 매몰된 자들의 합리적인, 즉 계산된 행위 결과이다.


시장의 규제적 이상인 경쟁은 반드시 승자와 패자를 나누며, 그 결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더욱이 고도경제 성장이 멈추고 나누어야 하는 파이의 크기가 작아질 때 경쟁은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으며 경쟁의 운동장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경우에는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전후 일부 국가의 경제 호황기에 가능했던 거대 기업과 노동 계급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정했던 복지국가는 민주주의와 시장의 계급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미국과 영국의 보수주의 정부는 작은 정부, 탈규제와 세율 인하를 위한 세제 개혁을 강조한 공급 중시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바탕을 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 후 2008년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으로 대표되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해 미국식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복지국가를 가능케 했던 계급적 타협은 전면적으로 파기되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아래 중산층은 몰락하였으며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민주권, 자치를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기반은 위축되었으며 시장의 경쟁 논리가 운전석에 들어 앉아 전 세계를 질주하고 있다.

 


IV.
시장의 탐욕과 경쟁이라는 규제적 이상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처럼 사위를 뒤덮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대학도 포획되었다. 교양 있고 정의와 공공성에 대한 감수성을 갖춘 시민을 배양하는, 공동체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대학 말이다. 졸업생 취업률이 대학 평가를 좌우하고, 대학은 기업이 채용해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잘 훈련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다는 사회적 비난이 이상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의 정의론과 맹자의 측은지심, 혹은 S. 호킹의 우주와 시간에 대한 훈련된 이해는 취업 준비생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되는 불필요한 혹 같은 것은 아닐까? 정말 그럴까?


정의와 공공성이라고 하는 공동체적 가치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시장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퇴화한다. 탐욕과 경쟁에 눈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무자비함과 참혹함의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다. 시장에서의 개인들의 사적 이익의 추구의 “의도되지 않은 결과”가 국가의 부로 이어진다는 시장에 대한 헌사로 읽히는 국부론의 A. 스미스는 스스로 먼저 도덕 감정을 전제한다. 시장에서의 이기심이 도덕 감정이 되는 전제조건은 바로 “공감(Sympathy)”이다. 그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적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즉 타인의 공감
을 얻는 한도 내에서의 이기심만을 시장에서 경쟁을 추동하여 국부로 이어지는 힘으로 보았다. 공감 능력과 신뢰를 상실한 이기적 개인들이 경쟁하는 시장은 자기 파괴적이며, 존재하기 어렵다.


대학은 젊은 학생들이 시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공동체적 가치와 신뢰,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마지막 장이다. 무자비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엄혹한 상황에서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공동체적 감수성에 대한 훈련이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성공을 담보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절실하다. 와해된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 설 자리는 없다.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이러한 훈련의 장으로서의 대학에 방향을 제시하는 유일한 길잡이별(guiding lights)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민주적 제도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데 참여함으로써 저절로 습득하게 되는 민주적 습성을 배양하는 데 전적으로 달려있다. 시장으로부터의 도전이 음습한 안개처럼 민주주의의 숨을 조여 올 때 대학은 최후의 보루이자 저항의 제1선일 수밖에 없다. 대학이 참여와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가 생동감 있게 살아 숨 쉬는 장이 될 때 비로소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대학의 민주적 리더십은 대학 구성원들 모두에게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북돋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러한 희망과 용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