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영어영문학과 강필중 교수
  • 입력 2016.05.24 07:54

[교수칼럼] 기술의 본질에 관한 단상

ㅡ‘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얼마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으로 증폭된 인공지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면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과제를 상기시켰다. 인공지능의 문제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 능력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어떤 수준에까지 이를 것인가 하는 기대 반 우려 반의 관심 앞에서 ‘철학적 사유’라 함직한 것을 새삼 가동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계산이나 계측을 인간보다 기계가 더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기계의 존재이유이므로. 기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종합적인 능력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저급하기 때문에 여기서 크게 기대하거나 우려할 것은 없다. 문제는 바둑에서처럼 단순계산으로는 도저히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반상의 형태가 정해지기 전에 예측하는 고도의 능력인데,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수를 찾아내는 복합계산의 능력은 알파고가 한차례 드러낸 일련의 불완전한 착수를 감안하더라도 가공可恐할만한 것이다. 입력된 수많은 기보와 착수를 종합해서 그때그때 최적의 수를 창출하는 능력은 정보량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수준의 능력이다. 스스로 평가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이 능력의 끝은 어디일까.

인공지능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인간의 뇌세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거나 인간의 뇌가 자기능력의 극히 일부분만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것을 만든 인간의 머리에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광대한 미지의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가정해보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그러한 미지의 능력을 선취先取한다면? 그러한 방향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질러가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스카이넷’이 인간세계를 황폐화시킨 디스토피아(dystopia)가 인간의 미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상과학소설에서 미래에 실현될 것들을 상상해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인간은 실현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무색해질 만큼 불가능한 상상을 하는 영화 「루시」에서는 두뇌의 능력이 백퍼센트 가동될 때 육신 자체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게 되는 ‘인간’이 등장하는데 이는 인간자신이 전지전능한 지능이 되어버리는 식으로 인공지능의 완성을 색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미래를 끊임없이 상상하게 하는 과학기술의 진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인공지능이 발전하여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에는 인공지능과 인간을 분리해서 보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자신의 향후관계에 대한 비관과 낙관이 공유하는 것은 기술과 인간의 이분법인데,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할 만큼 발전을 거듭한다는 생각에는 당초 인간이 자신의 어떤 능력을 과학기술에 위탁하여 그 발전을 가속화했는가하는 인간자신에 대한 물음이 빠져있다. 단순계산을 하는 계산기에서부터 고도의 복합계산을 하는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의 산물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관류하는 ‘인간의 드러남’이다. 근대화의 속성인 ‘합리화’는 효율화나 계량화의 의미를 내포하는데, 근대화를 향한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 지닌 특정한 능력만을 고도로 효율화함으로써 온전한 인간을 지탱하는 여타의 능력을 소홀히 하게 된 역사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단순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 ‘계산’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근대의 과학기술은 그 본질에서는 인간이 스스로를 특수하게 드러낸 결과이자 여전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의 본질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다”(The essence of technology is not technological). 기술과 인간을 분리한 뒤 양자의 대립을 암묵적 전제로 삼는 한, 인간의 미래에 대해 비관하거나 낙관하는 일만 남는 만큼 과학기술의 이름으로 섣불리 미래를 점치기보다는 기본으로 돌아가 ‘기술’에 담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보는 편이 유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