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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인제대신문
  • 학술1
  • 입력 2005.05.30 00:00

맑스, 왜 희망인가?

지난 28일(토)부터 이틀간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제2회 ‘맑스 코뮤날레'가 열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맑스, 왜 희망인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열띤 발표와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이후 낡은 유물로 취급받는 '시대의 천덕꾸러기'맑스를 '희망'의 맑스로 고쳐 부르길 원하는 것일까.

맑스와 그의 시대
맑스는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고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의 영향이 컸던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베를린대학 법학부에 진학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에 가입해 헤겔의 철학적 유산을 배웠다.

그러나 프랑스로 이주한 맑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과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면서, 입으로는 독일 현실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천성이 부재한 청년헤겔학파와 결별하게 된다.

청년헤겔학파 비판을 통해 맑스는 독일현실과 인간해방에 대한 가능성이 프롤레타리아트(노동계급)에 있음을 밝혀냈으며,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실천 철학을 제시하였다.

1848년은 프랑스는 공화정이 성립되고(2월 혁명) 민주주의, 민족주의 봉기가 발생하는 등 혁명의 해였다. 이에 맑스는 2월 혁명을 앞두고 『공산당 선언』을 썼다. 『공산당 선언』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고 시작하는 글로 기존의 사상들과 대별되는 급진적 사상을 '공산주의'라 명명했다.

1848년 혁명이 실패하자, 혁명을 지지한 맑스는 죽을 때까지 영국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이후 맑스는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국제 노동자 협회(제1 인터내셔널)를 창설, 전세계 노동자와의 연대를 통한 실천을 모색하였다.

1873년 맑스가 죽은 후, 맑스 후계자들이 맑스의 사상을 다양하게 해석 내지 실천, 수많은 사상들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사상을 통칭해 ‘맑스주의'라 부른다.

맑스의 두 가지 현재성 - 꼬문과 연대
오늘날 중요하게 취급되는 두 가지 개념 중 하나는 ‘꼬문'이고 다른 하나는 '연대'이다. 

〈꼬문〉은 흔히 ‘공동체'라 번역된다. '꼬문주의'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라 번역한다. 하지만 '공산주의'라고 할 때 기존의 소련식 사회주의가 연상되고, '공산(共産)'은 '함께 생산한다'는 뜻으로 경제적 의미로 축소될 우려가 있고,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경제적 의미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꼬문주의'를 사용하겠다.

맑스는 꼬문주의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이라 정의했다. 이때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맑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였다. 따라서 꼬문주의의 전제조건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여, 생산수단을 공유화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 철폐가 전제조건이라면, 자유로운 개인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가 '꼬문'이다.

어떤 누구에게도 억압이나 착취를 받지 않고, 수평적 인간 관계로 맺어지는 사회가 맑스가 꿈꾸는 꼬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꼬문은 정지되고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속담처럼,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꼬문은 더 이상 꼬문이 아니다.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완성형으로 보았다는 설명들은 맑스의 위와 같은 측면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맑스의 꼬문은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하지, 완성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대〉는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국제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앞서 설명한 '꼬문'은 하나의 통일되고 단일한 거대 사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색깔과 크기를 가진 '꼬문'들이 연대하는 모습으로 맑스가 주장하는 국제적인(international) 모습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라는 맑스의 표현이다. '꼬문'은 국가와 전혀 상관없다. UN과 같은 국가간 연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존의 국가 틀로 재단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들의 연대이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꼬문들이 서로 연대하는 모습, 그리고 이 꼬문들이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이것이 맑스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새로운 꼬문과 연대를 꿈꾸며
오늘날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은 확산되고 소수자들의 권리는 사각지대로 방치되어 있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경계도 더욱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1백50년 전 맑스가 보았던 세계의 변주이다.

우리는 맑스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를 묶어 자본주의 시대라 부른다. 당시 자유주의의 -오늘날에는 신자유주의가 몰아치고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맑스와 그의 시대, 그리고 맑스가 꿈꾸었던 꼬문은 바로 우리네 현실이다. 맑스가 극복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심화되었고, 그만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다.

“맑스, 왜 희망인가'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꿀 수밖에 없는 절실한 현실이 놓여져 있으며,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전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최창석 / 맑스 코뮤날레 조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