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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홍재우 정치외교학과 교수
  • 입력 2011.05.16 23:24

선거의 계절에 반정치(anti-politics)의 정치를 극복하자

이제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대놓고 얘기하지 못한다. 심지어 북녘의 어느 ‘민주주의인민공화국’처럼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는 독재정권도 그것의 이름과 형식을 흉내 내려 애쓴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주주의의 윤리적 승리가 보편화된 기간은 지극히 짧다. 민주주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내부적으로도 강고한 적대 세력과 마주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못마땅한 그 세력들도 민주주의를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른, 그러나 매우 교활한 전략을 쓴다. 그들은 민주주의 대신 ‘정치’를 비난한다. 정치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더러운 것이고, 부패했다고 외친다. 정치적이란 말 자체를 비굴하고 추잡한 것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정치의 누추함을 강조하고 저열한 시정잡배들의 싸움이라고 속삭인다. 그들이 장악한 언론은 정치의 추문을 집대성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유포한다. 결국 존재할 수 없는 무책임한 화합과 질서의 도덕으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혐오를 극대화한다.

정치는 인간사회가 피할 수 없는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정치의 임무는 갈등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사회가 파국적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일시적인 타협의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이런 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목소리를 ‘평등’의 원칙 속에서 풀어 나가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어 근본적으로 동등한 자격을 갖췄다는 원칙을 따른다. 따라서 인간 사이의 갈등이 불평등한 태생적 신분이나 부에 의해 해결되지 않고 평등한 정치적 게임 속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불평등한 사적 갈등을 평등한 사회적 갈등으로 만들어 해결하는 과정” 이라고 부른다.

정치 무관심과 정치 혐오는 이런 민주주의의 과정과 원칙을 무력화한다. 소수의 기득권층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약한 자가, 갖지 못한 자가, 소외된 자가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의 장에 대중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을 꺼린다. 근대민주주의가 시작되고 모든 성인이 투표권을 갖는데 백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많은 재산세를 내는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주어졌다.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이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통해 해소되는 것은 당시의 지배계급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공포였다. 오늘날 자연권에 가까운 민주주의 사회의 참정권은 그 시대에 피와 땀을 흘린 수많은 생명의 대가를 치루고 얻어낸 전리품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대중이 정치를 혐오할 때 민주주의는 사회의 모든 불평등과 불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름만 아름다운 권력의 도구로 타락하고 만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로부터 멀어지고 그것들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반민주주의 세력이 벌리는 반정치(anti-politics)의 시도는 최고의 정치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극복하는 일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다.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빼앗기고 있는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되찾는 일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도덕적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강한 자에게 부당하게 헌상하는 무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흐드러진 벚꽃과 함께, 방사능의 공포와 함께 다시 짧은 정치의 계절이 왔다. 민주주의가 시험대에 섰다. 4월 27일, 투표권을 가졌건 그렇지 않건 반정치를 넘어서는 참여와 관심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당신은 결코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정치의 주인이 될 수는 있다. 민주주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