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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10.08 00:00

돌연변이-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제6회 인제대학교 독서감상문 대학부 최우수작

    ▲ 구자민 / 언론정치·02
 아침이다. 어김없이 8시간을 채우고, 아스팔트처럼 딱딱해진 몸을 깨부수고 일어난다. 찬물로 여분의 잠을 몰아내고, 밤새 헝클어진 머리를 물로 다스린다. 수건으로 물을 대충 닦으며 촉촉해진 얼굴로 거울을 보고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본다.

 “ 괜찮은 얼굴인데? 나쁘지 않아 ”

 머리에 물도 채 마르기 전에,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냉수한잔을 마신다. ‘카~!’ 묘한 환희와 함께 전날에 쌓인 피로의 먼지를 완전히 털어낸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옷장을 열어붙이고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를 뒤적거린다. 옷이란, 유전자 운반기계를 햇볕의 따가움으로부터 감싸주고, 추위에 대비해 몸속 온기를 붙잡고, 거친 자갈밭으로부터도 살갗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력적인 이성에게는 “이 기계에 속한 유전자는 패션 감각도 좋음” 이라는 일종의 광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작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 난 소중하니까 아니, ‘나’라는 운반기계안의 유전자는 너무나 소중하니까….

 - 나의 행동들에 대한 의문과 그 해답

 앞서의 상황은 평범한 유전자를 가진 대학생의 아침 풍경이다. 유전자의 운반기계로서, 나는 반복되는 일상적 행동들에 대한 의문을 품어 본다. 잠은 왜 규칙적으로 자야 하는 걸까? 마음 놓고 푹 잘 순 없을까? 왜 사람은 씻어야 하지? 화장품은 왜 바르는 거야? 거울은 왜 필요하지? 왜 물과 밥을 먹어야 할까? 옷에 자꾸 신경 쓰이는 이유는 뭘까?… 일상과 관련된 모든 평범한 행위 (혹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해) 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질문의 가짓수는 수만 가지가 될 것이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학교가기 전까지의 행동들만 따져 봐도 이렇듯, 헤픈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말이다. 하지만, 수만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쩌면 하나일 수 있다.

 “ 유전자가 시키니까 ”

 다소 짧고, 허무맹랑한 대답일지 모르겠으나,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으로써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 그저,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 그렇다면 문제는, 도대체 누가 그런 걸 시키나? 그게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 라는 것인데, 내 생각에 명령을 하달하는 주체는 어쩌면 '신(GOD)'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유전자는 ‘신(GOD)’ 보다 확실히 위대하다. 오늘날 신이 ‘만들어진 신’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전쟁과 테러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태세를 하고 있다면, 유전자는 전 세계 60억 운반기계를 단 한마디의 설법도 없이, 설교도 없이, 교화도 없이, 심지어 그 어떤 선교활동도 없이, 약 3백 만년 동안을 개종 없이 지배해 오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종교를 가지지 않은 필자의 입장에서 ‘신’과 ‘유전자’를 비교하는 것에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유전자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적어도 종교보다 유전자이론이 훨씬 설득력 있다는 점도 ‘유전자’를 지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 게임의 법칙과 중요한 사실들

 핵심은 사실 그 너머에 있다.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없는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로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축구경기’ 에 비유해 보고 싶다. 하지만, 심판을 매수한 축구경기다.

 축구경기에 뛰고 있는 선수들은 오로지 골을 넣기 위해 집중한다. 공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사전에 훈련 돼있기 때문에, 멀리서 날아오는 공도 한 번에 잘 잡을 수 있다. 공을 잡은 선수는 드리블을 통해 상대수비를 뚫고, 동료들과 패스를 주고받기도 한다.

 순간 공을 빼앗긴 선수는 다급한 나머지, 상대수비를 향해 깊은 백태클을 가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레드카드’ 감이지만, 심판을 사전에 돈으로 매수했기 때문에 반칙은 없다. 때문에 퇴장도 없고, 경기는 다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흘러 갈 것이다. 상대팀 골대에 마침내, 골인에 성공했다. 스코어는 <1-0> 이 되었고, 같은 팀 선수뿐만 아니라, 서포터들까지 덩달아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한다.

 팀 동료들과 서포터는 우리들 몸속의 주인인 유전자에 해당된다. 유전자들은 경기의 유일한 목표인 유전자 복제와 존재의 확장에만 집중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승리’이자 원천적인 욕구다. 승리를 위해선 ‘골’이 필요한 것이고 ‘골’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야 말로 ‘게임의 법칙’인 동시에 목표이기 때문이다.

 골을 넣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볼 트래핑과 드리블, 슈팅들과 같은 생존 기술은 학습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경기의 대표선수는 유전자의 우열판단에 의한 감수 분열시 결정된다. 때에 따라서는 이기적인 계산에 의한 반칙을 감행해야 한다. 또한, ‘매수한 심판’이란 바로 유전자를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이기적인 설정이다.

 불행한 현실은 정작, ‘나’라고 생각하는 우리 존재는, 팀의 구단주도 아니고 감독도 아닌, 축구단의 ‘이동용 버스’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사전에 유전자에 의해 조직되고 계획되어지고 학습되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서글픈 일이다. 나의 정체성이란, 한낮 운반기계에 불과한 걸까?

 - 도킨스의 위로

 인간의 착한 마음, 도덕성, 효성, 배려, 관용, 이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체인 ‘이성’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모델에 불과한 것인가? 도킨스는 마지막 변명에서, 인간은 내부의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복제성과 대립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며 위로하듯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도킨스의 과학적 접근을 다소 걱정스러운 시각으로 보고자 한다. 이기적 유전자 론은 다분히 동물학자의 시각이자, 과학자의 오만이 뒤섞인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연역적 사고와 정연한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보다 인간적인 담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그것은 오늘날 더욱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비판적인 학문, 인간의 삶과 그 안에 존재하는 따뜻한 감성을 이야기하는 인문학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

 - 유전학 VS 인문학

 그래서 나는 주제넘게도,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고찰한다. 내가 인문학도 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도킨스의 시각으로 보면, 돌연변이 적 사고다. 인문학을 고수하는 것이 도저히 유전자를 이롭게 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 만능주의를 거부하면서, 치열한 경쟁에서 한낮 상품으로 도태되어 버린 인문학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하는 나는, 과감하게 돌연변이임을 자처한다.

 현재,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정착한 이기적 유전자론 과 인문학과의 상관관계가 얼마나 깊으며, 연관성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인문학은 바로 우리들 사고에 대한 고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란 그런 출발자체에 대한 의심을 시도한다. 그런 이성에 대한 회의가 곧, 인간 내면의 공격성과 이성적 사고간의 균형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도킨스의 주장은 대단히 포스트 모던한 발상 인 것 같다.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모든 진리는 의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기적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동이며, 이성(Reason)도 그 속에 속한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도킨스 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 에는 눈 , 이 에는 이’ 다.

 - 이기적이지 않은 인간의 모습, 진정성

 모든 인간의 활동을 유전자의 복제가능성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군 시절 봉사활동으로 장애인 및 독거노인들이 살고 있는 양로원에서 일주일간 지내본 일이 있다. 비록 나는 타의로 온 것이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목욕봉사 등을 하기위해 자원해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순수한 눈빛은 나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그들의 진실 된 땀방울에는 뜨거움이 느껴진다. 이는 오로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오로지 감동을 전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하는 행위에는 그 어떤 이기적인 계산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물론 일부 대학생들에게는 졸업요건, 취업 수단으로만 여겨지고, 일부 정치인이나 엘리트 기업인들에게는 일회성 이벤트로 전락해버린 사례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도킨스가 말한 이기적 사회활동이라는 해석이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일을 마치 전부의 일인 양 거론한다는 것 자체도 문제가 있다.

 우리 부모님들의 자녀사랑 또한 한낮 이기적인 유전자 보존행위가 아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아름다운 눈물의 씨앗이고,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실체로부터 사회 전체가 크나큰 교훈을 얻기도 한다. 유전자 보존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도 나는 어머니의 따뜻한 눈빛을 보며 무한한 감동을 느낀다. 친구에게서 경쟁심을 느끼기보다, 휴식 같은 만남자체에 감사한다. 이성에게서 흥분만을 느끼기보다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미래를 계획해 본다. 여전히 세상은 소외된 자들을 생각하고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준비가 되어 있다.

 이기적 유전자론도 일리가 있지만, 우리사회의 ‘진정성’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나는 과연 돌연변이 인가?

구자민 / 언론정치·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