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독자가 만들어낸 작가의 묵직한 농담, '회색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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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독자가 만들어낸 작가의 묵직한 농담, '회색 인간'
  • 전선진 기자
  • 승인 2020.04.05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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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사이비 교주로 살았던 남자가 죽었다.

 

그는 지옥으로 가게 될 걸 예상했지만, 지옥 관리들의 대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먼 길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악마들의 모습에 그는 당황했지만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지옥은 악할수록 계급이 좋은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보그나르교의 교주님이시니까 그렇지요!”

 

남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그나르교라고 해봐야, 자신이 멋대로 짜깁기해서 만들어낸 사이비 종교일 뿐이었다. 지옥 불에 수십 번을 갔다 와도 모자랄만큼의 죄도 저질렀다. 한데 이런 특별 대우라니.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악마가 귀빈실에서 그를 맞이하며 그의 궁금증을 해결시켜주었다.

“저희 지옥에서 새로운 정책으로 종교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두석규 님이 그 방면으로는 빠삭하시니, 교주 역할을 맡아주시면 어떻습니까?”

 

사정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지옥에서도 지상에서처럼 교주의 권력을 쥐고 살 수 있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 만든 종교의 이름은 환생교였다. 환생교의 신을 믿으면 언젠가 고통의 끝이 온다는 것이다.

 

다음 날부터 그는 교주의 복장으로 지옥을 순례했다. 지옥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유황불에 녹아내리는 사람, 도끼에 토막 나는 사람, 짐승에 뜯어 먹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멀쩡히 지옥을 걸어다니며 악마가 굽실대기까지 하는 남자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환생교는 순식간에 지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환생교 만세!”

“교주님 만세!”

 

남자는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다 받아들이세요. 절대 반항하지 마세요. 고통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시길. 욕할 시간에 기도하세요.”

 

사람들은 악마들에게 기꺼이 협조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웃으며 벌을 받아들였다.

 

1년 뒤, 악마들이 남자를 찾아와 그들의 지배자 중 하나가 환생교의 신으로 등장할 예정이니 잘 부탁한다 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신께 닿아 직접 강림하십니다!”

 

환생교의 신도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윽고 후광을 내비치며 신이라고 불릴 말한 존재가 나타났다.

헌데,

 

[너는 내 사람이 아니다.]

 

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교주인 남자를 찢어발겼다. 모두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을 때 신은 말했다.

 

 

...

 

-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 <회색 인간> 中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을 읽다 보면 프랑스 소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떠오른다. 파피용, 개미와 같은 대표작을 가지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중 ‘나무’나 ‘파라다이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한국에선 흔하지 않은 장르와 문체라고 느껴졌다. 24편의 단편으로 묶인 <회색 인간>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몇몇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핵심을 정곡으로 찔러버리기도 한다. 비선 실세, SNS, 매국노, 사이비 등의 단어를 과감하게 써 내려간다. 비상식적인,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허구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에는 묵직한 농담 같다.

 

김동식 작가는 ‘독자가 만들어낸 작가’라고 불린다. 그는 2016년부터 커뮤니티 게시판에 창작글을 올리기 시작해 300여 편이 넘는 글을 썼다. 고작 1년 6개월 동안 말이다. 글 한 편의 길이를 원고지 30매로만 잡아도 원고지 1만 매 정도의 분량이니 작가가 글에 들인 물리적인 시간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 공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조금 넘은 데다 글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글을 쓰고 싶은데 배운 적이 없어 포털사이트에 글 쓰는 법을 검색해 기승전결, 접속사 같은 내용을 습득했다. 요즘 ‘내 옆자리 대리님이 취미로 글 쓰다가 작가로 전업했어요’ 같은 경험담의 선두주자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많은 활자를 접하다 보면 말랑한 글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호흡이 짧고, 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글 말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있거나 뻔한 전개가 장황하게 늘어지는 글말고, 내 예상이나 상식을 빗나가게 해서 ‘아차’ 하게 만드는 글말이다. 그럴 때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