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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전선진 기자
  • 기획
  • 입력 2019.10.05 01:16
  • 수정 2019.10.07 15:07

'형형색색' 1화 - 공존과 결합의 형태

 

“이거 한번 봐봐”

내가 니콜라에게 권한 건 <북저널리즘>에 소개된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이었다. 프랑스에서 팍스를 맺고 파트너와 살고 있는 이승연 씨의 경험담이 담긴 책이었는데, 늘 오래 만난 연인과 동거를 꿈꾸는 니콜라가 흥미를 보일 것 같았다.

시민연대계약을 일컫는 팍스(PACS, Pacte civil de solidarité)는 1999년부터 프랑스에서 시행 중인 성인 간의 시민결합제도로 부부에 준하는 사회적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시민 결합제도는 국제적으로 확고히 정해진 기준이나 규격이 없기 때문에 명칭 또한 시민동반자관계(Civil Partnership), 등록된 동반자관계(Registered Partnership), 가정동반자관계(Domestic Partnership), 생활동반자관계(Life Partnerships)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팍스는 상대방과 혈연관계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결혼이나 팍스 관계에 있지 않으면 누구나 지방법원에 계약서만 제출하여 등록할 수 있다. 또 한쪽이라도 팍스의 해소를 원하면 관공서에 알리는 것으로 해소가 인정된다.1)


니콜라는 매거진 화면이 띄어진 내 휴대폰을 뚫어지라 보더니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훑었다.

“음.”

“어때?”

“아, 원래 팍스는 동성 연인의 사회적, 법적 보호를 위해 만들어 진 거네?”

“그렇지, 하나의 정치적 대안으로 탄생한 거야. 재밌는 건 당초 동성 커플의 결합을 인정하기 위해서 도입된 거였는데 2016년도 통계2)에 의하면 팍스를 선택한 커플의 96%가 이성애자래.”

“동성혼의 대안라기보다는 결혼의 대안가 된 건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2000년에는 2만 2천 명이었는데 2016년에는 19만 2천 명으로 증가했으니까.”

“그런데 프랑스에 팍스가 이렇게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우리나라에 비해 적은 근로 시간이나 보육 시설 무상지원에 관련된 부분을 말하는 거지?”

“응, 결혼 여부나 아이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삶이 흘러갈 수 있는 문화니까.”

“뭔가 제도보다도 결국 프랑스의 문화가 만든 일련의 태도인 것처럼 느껴지네.”

“그렇지. 제도가 문화를 바꾸었다기보다는 프랑스의 성향이나 문화가 제도를 낳은 것 같아.”

*

시부모님은 “왜 결혼이 필요한지”를 묻는 내 질문에 너무나 쿨하게 “파티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라고 하셨다. 결혼만큼 많은 사람과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벤트가 없다는 것이다. 두 분의 말씀을 듣고,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갖춰져 있으면, 오히려 결혼은 하루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승연,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중에서

 

프랑스는 팍스
우리나라는 동반자법?

“기존 가족 관계를 위협하는 건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돌보며 살 수 없도록 하는 팍팍한 현실이다. 생활동반자법은 사람들이 서로 돌보고 가족을 이루어 살도록 장려하는 법안이다.”

지난해 8월 30일 진선미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에 임명된 이후, 2014년 발의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졌던 법안이 화두가 됐었다.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 이 법안은 보통 혈연과 결혼으로 구성되는 가족의 개념을 확장해 혼인이라는 제도 없이 서로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진 ‘동반자’라는 새로운 법적 주체를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반자 관계를 설정해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당시 보수 기독교와 시민단체가 동성혼을 합법화한다며 이 법안을 강하게 반대해 발의조차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지난해 7월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 내용에는 동성 커플 중 한 명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음에도 법적 배우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며 ‘동반자 등록법’을 제정해달라는 호소가 담겨있다. 이는 그들이 동성 커플이 아닌 이성 커플이라 해도 같은 상황에 놓인다. 직계가족이 아니면 밤샘 면회 자격이 없는 경우도 다수 존재한다. 가까이 사는 생활동반자보다 혈연으로 맺어진 ‘먼 가족’이 더 우선시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3)

*

“니콜라. 이런 법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 어떨 것 같아?”

“글쎄, 모르겠어. 지금까지 전무한 사례였고.”

“그래도 변화를 추구하는 목소리가 있고, 정말 도입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우리나라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어야 하고.”

“나는 미디어로 인해서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고 생각해. 유튜브를 통해서 실제 동성 커플의 일상을 보여준다던가 이성 커플의 동거생활을 콘텐츠로 삼는 유튜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이를 지지해주는 사람도 매우 많더라고. 생활동반자법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또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한다면 어떨까?”

“그렇지만 그 법안이 발의조차 되지 못했던 이유는 결국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그건 그래. 하지만 지표4)로 봤을 때 사랑의 한 형태로 인식한다는 의견이 반 이상이더라고.” 

“그래도 우리는 기성세대와 공존하고 있는걸.”

“뭐, 세대교체는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잖아. 법이라는 게 쉽게 생기고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장기적으로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니콜라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매거진을 넘기는 손이 멈췄다.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굳이 커플이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해. 결혼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친인척이 돌보지 않는 사람, 실질적으로 함께 장기간 살아가야 하는 관계나, 친구, 보호자, 장애인에게도 확대된다면 어떨까?”

“괜찮네. 그건 정말 좋은 것 같아. 그런 동반자법이라면.”

*

더욱이 1인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에서 생활동반자법을 통한 법적 보호 필요성은 커진다. 법률상 1인 가구로 분류되어 임대주택 신청이나 전세 자금 대출에서 뒷순위로 밀리는 현실도 그중 하나라고 한다. 보험 혜택도 그렇다. 사실혼 관계인 A씨는 “교통사고가 났는데 사실혼 관계라고 하자 이를 확인한다며 보험회사 직원이 속옷 서랍장까지 뒤져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건강보험을 따로 가입해야 하고 연말정산에서 배우자소득공제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5)


우리와 혼인과 가족제도가 비슷한 일본의 경우 중앙정부 차원의 제도 마련은 없었지만 지자체별로 ‘파트너십 증명제도(パートナーシップ証明制度)’를 통해 법률상의 혼인과 구분하되 혼인관계와 다르지 않은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제도를 가장 처음 시행한 시부야구뿐만 아니라 주변 구에서도 확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6)


이런 새로운 가족 형태에 따른 동반자법 제정은 진선미 장관의 발의 준비에서만 그치지 않았었다. 지난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심상정 의원도 ‘다양한 가족 구성을 위한 동반자등록법 제정’을 공약하기도 했으며, 6.13 지방선거에서 김종민,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는 ‘동반자 관계’ 증명 조례를 공동 공약으로 내걸었었다. 하지만 니콜라가 이야기했듯,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서에는 아직 깊게 스며들지 못한 이 제도적 장치들은 현실화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

“니콜라, 만약 이 법안이 제정되면 너한테 굉장히 좋은 일 아니야?”

“왜?”

“동거하고 싶다며. 그러면 그 동거 생활이 법적으로 보장되는 거잖아.”

“그렇진 않을 것 같아.”

“그래? 결혼도 염두에 두고있어서인가?”

“응, 생활동반자에서 관계가 멈춰버릴 것 같아.”

“아, 그러니까 결혼하지 않고 계속 생활동반자로만 지내게 될까 봐?”

“그렇지. 결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직은 나한테 큰 것 같아.”

“그렇구나. 그래도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결합은 아직 ‘혼인’밖에 없으니까 다른 대안이 필요할 것 같긴 해. 요즘에는 워낙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결혼에 부담을 느끼는 세대니까.”

“맞아, 필요하지. 팍스를 놓고 본다면 프랑스라는 특수성을 벗어나더라도 현시대 문화의 보편성을 위해서는 필요한 제도이니까.”

*

진선미 장관이 이야기했듯, 이제는 혈연, 지연, 입양보다 서로가 의식으로 기대고 사는 관계들이 많아지고 있다. 실존하는 모든 관계와 결합(partnership)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세대가, 사회가 이런 관계들에 공식적인 정의를 내리기 바란다면, 그때는 정말 현실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계라는 것은 우리가 예측하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에 귀속되어 있고, 또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보장받길 원한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영원할 수 있도록 증명되길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공존과 결합을 위한 새로운 대안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함께 읽기
이승연,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북저널리즘』, 
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출처
1) 박문각시사상식편집부, <시민연대계약>
2) 위와 동일 3) M경제매거진, <진선미 여가부 장관 취임… 생활동반자법 제정되나>
4)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동성애도 사랑의 한 형태로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56%이다.
5) 한겨례, <[단독] 생활동반자법이 뭐야? 동거·사실혼 관계 등 정책적 보호>
6) 투데이신문, <“혼인·혈연관계 아니어도 ‘가족’ 인정돼야”…높아지는 ‘동반자등록법’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