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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안태선 기자
  • 대학
  • 입력 2019.06.24 17:10
  • 수정 2019.06.25 13:39

[교수에게 묻다] 채두병 교수에게 '대학'이란?

▲ 채두병 국제경상학부 교수
▲ 채두병 국제경상학부 교수

‘대학’이란 무엇인가. 교수는 연구하고 가르치며 학생은 배우는 터전이란 것 쯤은 흔히들 아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취업학원으로 전락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대학은 시대의 부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할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학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학에 관해 교수에게 묻는다. 국제경상학부 채두병 교수가 생각하는 ‘대학’이란 무엇일까.

 

대학이 이전처럼 지식의 상아탑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지식의 상아탑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는 할 것이다. 지식의 집합체이며 지식의 보고이기도 하며, 지식을 전파하기도 한다. 어느 단체보다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은 혹시 대학의 역할이 단순히 지식의 축적과 전파와 개발에 국한할 것인가, 혹은 다른 역할이 또 있지는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학이 지식의 상아탑 외에도 다른 역할이 있지는 않은가. 대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 그 외의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 많은 것들을 대학에서부터 가르친다. 이것이 이른바 ‘전인교육’이라고 하는 것이다. 종전에는 중·고등학교에서 이루어졌으나, 현재의 교육상황과 체계를 보면 중학생 때부터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위해 미리 교육받는다. 좋은 고등학교를 가야 좋은 대학교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어린 시절을 입시공부에만 전념하게 강요를 하고 있다. 실제로 전인교육 즉,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후배들과 주위사람들과 어울려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지나치게 학생들을 취업문으로 몰고 가는 것은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학생들이 그런 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옛날보다 부족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전 세대(1970~1980)의 학풍은 어떠했는가.

7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가 하면, 80년대도 마찬가지지만 경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이 발돋움하던 융성기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인 군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정치적·사회적으로는 여러 가지 불만과 비민주적인 점이 많았고 젊은 대학생들 중 용기 있는 학생들이 반발하여 운동권이 되었다. 일부 학생은 운동권으로 가고, 일부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때는 수업이 많이 진행이 안됐다. 데모하고 최루탄 쏘고 정부에 저항했다.

그때 책을 참 많이 읽었다. 사회과학책도 읽고 인문과학책도 읽었다. 그때는 아직 전문영역이 깊이 들어가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런저런 과정들이 결국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옳은 대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취업준비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던 시기였다. 대학진학률이 30~40%로 대학생 수가 많지도 않았다. 지금은 70%이상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간다. 전공을 잘해서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나 전공에 매진한다기보다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대학이 이전에 비해 취업에 치중하는 비율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공감하는지.

현재는 취업률이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으니 학생들이 안 매달릴 수가 없다. 학생들 역시 그렇다. 10여 년 전 학생들은 막노동을 해서 그 돈으로 후배들에게 술을 사주고는 했다. 끈끈한 정이 이어져 리더십도 생기고 조직력도 생긴다. 이것은 직장에서도 연결되어 얼마나 소통하고 인간관계를 하느냐가 업무능력보다 뛰어날 수도 있다. 창의력 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창의력과 상상력도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것을 학생들이 싫어서 안 한다기보다는 학생들이 신경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 세대의 대학생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공을 열심히 공부해 취업을 위한 자격증을 많이 갖추고 학점을 잘 받아 취업문턱을 넘어서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것 못지않게 대학에서 습득하고 다듬어야할 것이 있다.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을 보는 눈,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문제이다.